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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Nov 15. 2024

장성 우시장에 간 이유

가을 단풍이 한창 제철인 정읍 고창에 갔다.

백양사 오묘하게 황홀한 단풍놀이 즐긴 다음 장성으로 향했다.

아들이 그쪽까지 간 길이니 이왕이면 장성 우시장 국밥 한번 맛보라고 권해서였다.

호오~우시장이 아직도 열린다고라? 뜻밖이었다.

어릴 적 5일 10일에 열리던 충청도 고향 장날 기억이 아슴한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맘때 서리 내려 뽀얀 새벽녘, 쇠전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울음소리 잠결에 들으며 그새 또 장날이구나 했었는데.

언제인가 무슨 일로 해서인지 아득하지만 여하튼 이른 시각, 읍내 큰 다리 옆의 쇠전에 간 적이 있었다.

즐비하게 열 지어 선 말뚝마다 한 마리씩 매여있던 소들이 죄다 허옇게 내뿜어대는 김을 보고 시루떡 찌는 거 같다고 했었는데.

외갓집 마당 건너 햇볏짚 두둑이 깔린 외양간에서 여물 우적우적 씹으며 한없이 선한 커다란 눈 끔뻑대던 황소는 속눈썹 유난히 길었다.

이후 완전히 잊고 살아 낯선 세계가 됐는데 우시장이라니, 신기하기만 했다. 당연히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게 전라도 장성이란 지역을 난생처음 찾아갔다.

나중에 위치가 어디 짬이었나 지도를 펴보니 바로 옆인 광주 담양까지만 와봤을 뿐이다.


장성군 황룡 우시장 바로 코앞에 허름한 우시장 국밥집은 납작 껴안겨 있었다.

우중충한 식당 안, 의외로 손님이 그들먹해서 우선 자리를 잡아놓고 밖으로 나왔다.

하얀 지붕을 덮어쓴 우시장은 아주 말쑥했다.

예전, 질펀하니 쇠똥 범벅이든 우시장은 소나무 말뚝만 박힌, 마치 영화 속 노예 시장터 같은 살풍경한 모습이었는데.

커다란 전광판까지 갖춘 현대화된 우시장이 그러나 왠지 영 낯설었다.

대충 우시장을 돌아본 다음 식당 주변, 달동네 같은 어수선한 둘레를 설핏 둘러봤다.

국밥집에 연달아 이어진 야외 부엌에 솥단지 두 개가 얹힌 부뚜막이 그때 눈에 들어왔다.

장작불이 괄게 타오르고 있었고 진국 맛을 우려내는 큼직한 가마솥에선 뿌연 김이 뭉텅뭉텅 솟아났다.

숯덩이 바알간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잠시 곁불 쪼이며 천상 양반은 못되네, 싱긋 혼자 웃기도 했다.

마침 식당 쥔 할무이가 나오기에 언제 우시장이 열리냐 물으니 매주 목요일이라며 요새는 경기가 팍 죽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전라도 함평 영광 영산포 등에서도 우시장이 선다고 했고 전광판을 1억 얼마인가 들여 나라에서 만들어 줬다고 자랑했다.

경매를 주관하는 축협에서 지원금이 나왔는지 국고 지원인지야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시장치고는 전반적으로 깨끗한 신식 구조였다.



툭 내던지듯 말하는 메뉴가 단순해 선택은 둘 중 하나, 각기 쇠머리 국밥과 내장국밥을 시켰는데 뒤에 보니 따로국밥도 있었다.

반찬은 풋배추 김치, 깍두기, 땡초와 양파, 새우젓, 양념장과 된장, 아주 담박했다.

소탈한 장터국밥이 늘 그러하듯 당연히 국물에 밥을 말아서 뚝배기에 내왔다.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고집하는 식객이라면 이렇듯 투박진 대접이 어떨지 모르겠으나 우시장 국밥은 바로 이 맛을 즐기는 거.

국밥 뚝배기에 새우젓 적당히 넣어 간을 맞춘 다음 양념장도 약간 풀었다.

첫 수저를 떠먹어보니 이리 궁벽진 시골의 보잘것없는 식당이 어떻게 유명해졌을까, 답이 금방 나왔다.

걸쭉한 국물이 입에 착 감기는데 구수하고도 달았다.

원재료 넉넉히 넣어 푹 끓이고 오래 고아야 나오는 깊은 맛, 그야말로 바로 진국이었다.

뜨거운 국밥을 연거푸 떠먹으면서 시원하다는 소리가 저절로 따라 나왔다.

비법은 아마도 새벽 세시부터 장작불 지펴 온종일 끓여낸다는 저 반질반질한 가마솥 맛 아닐까.

양파 슬쩍 된장 찍어 곁들이면 그만으로도 다른 찬은 필요 없었다.(그러고 보니 김치 맛도 안 봤더군)

전혀 멋 부리지 않은 담백한 맛이요, 분위기요, 상차림이었으니 그 색다름만으로도 특식 흡족하게 즐긴 셈이다.

3대째 전통 잇는 솜씨라는 추임새 없이도 뚝배기 그득 담긴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싹싹, 특별한 한 끼 아주 잘 먹었다.

무엇보다 창천 빛 부셔 눈 가느스름하게 뜨고, 고향마을 같은 시골 정취에 젖어든 채 유년의 추억에 잠길 수 있었기에 더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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