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여전했다. 여하한 변화의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 바다가 궁금해 찾아간 곳 베니스 비치. 계절 감각 무색하게 높다라니 솟은 시원스런 팜트리. 겨우 겨울 기운 스민 조경수 붉은 듯 누르스름한 빛으로 변해갔으나 바다는 여전히 아득하도록 푸르렀고 생동감 넘치게 힘찼다. 너른 모랫벌 너머 푸른 수평선이 저만치 드러나고, 해안 구조대 타워를 지나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바위들이 한 무더기 부려진 방파제에 갈매기 쉬고 있다.
일단 베니스 비치에 닿으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그래피티의 야생성이 거칠게 다가선다. 젊은이들의 해변답게 스케이트 파크 방향에서 들리는 환호성 하며 붕 떠서 도 넘치게 활기찬 반면, 어수선하고도 무질서한 것이 우범지대 냄새조차 풍긴다. 칙칙한 전체 분위기 자체도 비호감이라 선뜻 움직일 마음이 내키지 않을 정도다. 주말이 아니라서인지 비교적 한산한 거리. 그래도 비치니까 당연히 모래해변이 너르게 펼쳐진 바닷가 쪽으로 향한다,
비치 입구에 테니스코트 등과 야외 트레이닝장까지 갖춰져 있는 머슬 비치는 분명 색다르고 재밌는 눈요깃감이다. 오션 프런트 웤(Ocean Front Walk)을 따라 롤러스케이트, 인라인, 롤러 보드를 타는 청년들이 휙휙 스쳐 지난다. 산타모니카 비치에서부터 남쪽 요트장이 있는 마리나 델 레이까지 자전거 코스로 연결되어 있다는 Venice Beach Bike Path도 옆을 따른다. 길가 양켠에는 모자며 티셔츠나 액세서리 등속을 파는 가게와 노점상들이 즐비하고, 한가로이 흐르는 인파 속에는 꾀죄죄 남루한 차림의 부랑자도 섞여있다. 바다를 마주 보고 서있는 앤티크풍의 해묵은 주택 곁에는 유리로 지은 현대 감각의 깔끔한 집 뜨락 의자가 아주 편안해 보인다.
길게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간 피어. 주변엔 서핑이나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숱하다. 초미니 비키니 차림의 모델 노릇을 하려면 몸매가 팔등신쯤은 되어야겠지. 웃통 벗어젖히고 남성미 물씬 풍겨 보이려면 근육이 슈왈츠제네거에는 못 미쳐도 저 정도는 되어야 폼을 잡을 듯? ㅎ 파도와 하나 되어 노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고 환하다. 굼실거리는 파도는 연달아 해안가로 달려와 희디흰 포말로 산화하며 물보라를 남긴다. 세상사 온갖 오탁이 섞인 강물을 다 받아들이고도 저리 청청한 바다. 약 3%의 염도가 그 모두를 정화시킨다는 게 새삼 신비롭다. 짙푸른 바다는 한정 없이 바라보고 있어도 싫증 나지 않지만 그쯤에서 자유분방한 비치를 뒤로하고 애초 목적했던 대로 운하가 있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오래전, 이태리 베네치아의 석조건물들이 황혼녘 금빛 물 위에서 출렁거리던 그 일렁임이 떠오른다. 다분히 몽환적이었던 베네치아가 주는 비현실감 대신 베니스 비치 운하는 베네치아와는 격이 전혀 다른 것이 다정다감 곰살스러웠다. 사진을 통해 이미 충분히 낯 익혀진 운하와 주변 풍치. 단정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정경들은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정취가 느껴진다. 실제 그 마을 안을 거닐어보니 사진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그곳만의 향기와 정서가 있음을 알겠다. 언어 구사 역시 턱도 없이 미진해 그곳 고유의 품격 표현에는 근접조차 못하고 만다는 걸 자인하게 된다.
아늑하고도 고즈넉한 느낌은 한 단어로 그저 평화, 오직 평화로 집약된다. 베니스 비치 보드워크의 활력과 혼잡과 소란에 더한 퇴폐적인 나른함은 어쩐지 머나먼 딴 행성의 일만 같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네덜란드나 이태리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라스베이거스의 베네시안 호텔을 찾지 않더라도, LA 도심 바로 곁에서 이국적인 운하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엔젤리노들은 복이 많다.
백여 년 전만 해도 베니스 비치는 쓸모없는 습지였다. 1836년 대홍수가 근처를 쓸고 지나간 후 근방에서 금이 발견되며 채광업자들과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태리의 베니스에 심취해 있던 Abbot Kinney는 담배사업으로 재력가가 되자 1905년 해안가 일대를 매입해 그의 파트너인 Francis Ryan과 함께 미국판 베니스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펼친다.베니스 카날이 조성되자 처음엔 곤돌라와 사공까지 이태리에서 공수해 올 정도로 그들은 열성을 기울였다. 그러나 비치 리조트 타운이 본격 개발돼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부작용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하수처리시설 등 난제를 풀지 못해 결국 운하를 메워 원상태인 습지로 환원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주민공청회와 투표를 통해 아취 어린 운하를 살리기로 온 시민이 힘을 모아 오늘에 이르렀다. 다양한 건축미와 예쁜 정원을 자랑하는 고급스러운 집들이 Venice Canals 양켠으로 촘촘 이어진 아름다운 풍광은 운하에 걸린 하얀 다리와 조화를 썩 잘 이룬다.
동서양 누구나를 막론하고 나이 들어 웬만큼 삶의 여유가 생기면, 유년기를 보낸 고향이나 모국에 대한 향수를 가일층 느끼게 됨은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중국 마을 네덜란드 마을 독일 마을 덴마크 마을을 이루어 끼리끼리 모둠살이를 하며 자기네 민속과 전통을 지켜나간다. 미국이라는 신세계로 옮겨와 살아가지만 뿌리에 대한 애착은 갈수록 심화되기 마련. 특히 모국에 대한 동경심과 자부심이 남다른 대부분의 유럽 이주민들은 집이나 가구며 그릇까지 유러피안 스타일을 선호해 그 방식으로 꾸미고들 산다. 거기다 막대한 부까지 거머쥔 능력자라면 그리운 고향을 인공적으로 현지에 재현시켜놓고 싶을 터. 기타 자기가 특별히 관심 갖는 지역이 있다면 그대로 본뜬 축소판이라도 만들어 놓고 즐기고 싶을 법하다. 애버트 키니가 그랬듯이. 베니스 카날 주변을 이웃 산책지삼아 유유자적 거닐며 살만한 여건이 된다면 좋겠다는, 그만한 부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말리브나 비벌리힐스에서는 들지 않던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