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카날에 매료되어 오후 시간을 뚝 베어낸 터라 워싱턴가의 한 이태리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현지인이 추천한 맛집다이 셋이 각기 다른 메뉴를 주문했는데 음식마다 나름 맛이 있었다, 안데스 고원에서 자란 키노아 위에 상큼한 양념 채소가 얹힌 주요리 곁에 아보카도와 요거트 그리고 반숙 계란이 내 몫으로 나왔다. 꼭 겉보리 불어 터지게 삶아놓은 듯한 키노아에 크랜베리와 방울토마토 넣고 볶아낸 음식은 까탈스런 내 입맛에도 아주 잘 맞았다. 마침 시장하기도 해 더욱더 그러했겠지만. 부녀는 커피를, 나는 핫쵸코 잔을 들고 비치로 내려갔다.우측으로 산타모니카 해변이 보이고 좌측 멀리로는 LA 도심이 아른거렸다.
우리는 이제 여유있게 선셋을 기다리기로 했다. 양쪽으로 끝 모르게 이어진 백사장은 폭까지 넓은 데다 모래가 두터워 푹신했다. 비치타월을 깔고 모래톱에 앉아 태평양으로 지는 베니스 비치의 석양을 바라볼 참이었다. 갑자기 딸내미가 열한 시 방향! 고래야!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순간 까만 몸체가 서넛 드러나더니 한 녀석은 자맥질 묘기까지 보여줬다. 벌떡 일어나 카메라를 눌러댔다. 예상치 않았던 뜻밖의 선물에 감읍, 심장 박동이 북소리 같았다. 제주 대정 노을해안길에서 돌고래를 만나는 시각도 대개 네시 무렵. 이 시간대가 고래들이 집으로 이동하는 때인지 태평양에서 고래를 목격한 것도 비슷한 시간대였다. 고래 무리는 LA 도심 쪽에서 와서 산타모니카 해변을 따라 점점 사라져 갔다.
바다엔 서핑객과 물놀이 즐기는 아이들, 널따란 해변에는 구기운동하는 이들과 산책하는 이들이 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처럼 선셋을 마주하려 온 이들 숫자가 늘어갔다. 딸내미는 어느새 이십 수년을 엔젤리노로 살아왔으니 도처의 명소를 잘 알 터. 인근 비치 중에 노경의 부모에게 알맞은 장소를 택했을 테고 그 감 혹은 촉이 제대로 주효했지 싶다.네 시 반 경부터 수평선 위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가며 노을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색조. 바다는 색다른 빛의 향연을 무한공간에 펼쳐놓았다. 푸른 창천과 대양에다 초대형 걸개그림을 걸어놓았다. 수채화로 그린 화폭이되 팔레트에서 따스한 색상만 골라 붓질한 추상화다. 장엄하게 그러나 그윽이 젖어드는 노을빛. 눈부신 금빛 광채 마지막으로 한껏 발하더니 네시 사십 삼분 비로소 해가 졌다. 소멸해 가면서도 저리 현란한 빛깔로 연소할 수 있다는 생명의 기적 혹은 역설. 우리는 그 오묘한 색조의 여운에 취해 오래도록 모랫벌에 붙박여 있었다.우리도 노을 지듯 그렇게 어느 날 홀연 고요하게 질 수 있다면. 미련없이 회한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