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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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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Dec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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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하늘도 화창하고 바람결 부드러운 매듭달 아침이다.
겨울치고는 대체로 포근한 날씨라
그냥 지나치기 아까웠다.
이른 시각부터 대청소에 들어갔다.
우선 창문을 죄다 열어 환기시키고
윙윙 청소기를 돌리며 부지런을 떨었다.
마무리로 찬찬히 마룻바닥 물걸레질하느라 무릎도 꿇었다.
개운한 기분으로 창문을 내리는 중
집 앞을 지나던 이웃 노인이 눈에 띄었다.
늘 오전 이맘때쯤이면 귀여운 강아지와 동네를 산책하는 분이다.
머리엔 사철 모자를 얹고 다니는
약간 구부정한 어깨를 한, 장신의 노인이다.
우리 집 차도 앞에서 멈춰 서더니 큰 키를 숙여 무언가를 줍는다.
거리가 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서서히 허리를 펴고는 그걸
집 앞에 걸어둔 크리스마스 리스에 얹어놓는다.
나중에 보니 리스에 달았던 조그만 은색 종이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잔디밭이 끝나는 곳에 리얼터의 주택 매매 광고판이 아직도 서 있다.
찬바람 휘몰아치는 겨울이라서인지 유독 하얀
광고 말뚝이 무뚝뚝하게 보였다.
거기에다 집안에 장식하고 남은 리스를 걸어두었던 것은 12월 초의 일.
그리고 곧바로 그리도 고대하던 결실을 거두었다.
비수기에 의외였다.
추운 철에는 주택 마켓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는데 기적같이 집이 팔렸다.
하늘의 선물이듯 주어진 은총에 오직 감사! 또 감사!
집 키를 넘겨주기 전까지는 물론 완전하게 종결된 일은 아니나
그분께 모든 걸 오롯이 맡긴다.
이사 앞두고 엉거주춤 상태인 금년이라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지 않았다.
피톤치드 향이 짙게 풍기는 생 전나무에다 꾸미던 리스도 준비하지 않았다.
해마다 손님들에게 직접 만들어 건네던 리스 선물마저 올핸 생략되었다.
생나무로 엮은 리스 틀을 수 십 개 사서 먼저 중심 잡고자
포인세티아 꽃송이부터 끼워 놓는다.
그다음, 금종 은종에 솔방울이며 오밀조밀
예쁜 장식들 조화롭게 달아맸다.
리본으로 마무리하면서 반짝이 가루에 파묻혀 지내곤 한
행복 달콤한 12월 첫머리였는데 올핸 이사 준비한다고 모든 걸 생략했다.
대신 작년에 쓰고 갈무려 둔 크리스마스 리스를 꺼내
여기저기 걸었으나 꼬마전구 전선도 빼버린 채다.
그렇게 성탄 분위기 조촐하니 연출하고는
기분으로나마 캐럴 송을 들었다.
그중 하나인 집 앞뜰 리스.
여기에 보인 이웃 노인의 작은 친절이
오늘도 기어이 내 말문을 열게 만들었다.
바람에 뒤채이다 떨어진 은빛 종을 주워서 제 위치에 걸어준 그분처럼,
미소 떠오르게 하며 마음 따스히 덥혀주는 일들.
눈여겨보면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리라.
시골버스를 같이 타고 가던 도반 스님이 주머니칼을 꺼내어
덜컹거리는 차창틀의 나사를 조여주는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는 글을 법정 스님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난민 구제를 위해 재난지로 달려가는 것만이 자선은 아니다.
구세군 냄비에 금일봉을 쾌척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질병이 만연하는 지역을 찾아 의술을 펴는 것만이 인(仁)은 아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에 쌀을 보내는 것만이 보시는 아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선행이 보다 값진 것.
거창한 자선사업이 아니라도
길바닥에 박힌 사금파리 한쪽 줍는 것,
누군가의 하소연에 고개 끄덕여 공감해 주는 것,
힘껏 달리는 이에게 응원 보내며 격려해 주는 것,
혼자 보고 지나치기 아까운 좋은 책 또는 영화를 권하는 것,
고통받는 이의 아픔에 동참해 주는 것,
양손에 든 무거운 짐을 나눠 들어주는 것 ,
힘겨운 고갯길 넘는 이와 다정히 같이 동행해 주는 것,
기도가 필요한 이를 위해 손 모아 주는 것,
괜찮은 정보는 두루 공유하는 것,
광장 구석에서 뒹구는 휴지 한 장 줍는 것,
슬픔에 빠진 이를 가만히 싸안아 주는 것,
나와 생각이 다른 이를 역지사지로 이해해 보는 것,
어려운 이에게 따뜻한 눈빛 보내는 것 등 등 등...
이 작은 사랑, 관심, 배려, 성원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겠는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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