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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03. 2024

 백합화 향기 그윽한 청라언덕

서울로 향하기 앞서 언니가 나부터 터미널에 내려주었다.


안동에서 부산으로 직접 갈 수 있는 차편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오전 11시경이었다.


부산 가는 버스가 막 떠났기에 바로 옆에 있는 열차역으로 가봤으나 기차는 하루에 서너 편뿐.


다시 버스역으로 돌아와 12시에 있는 부산행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티켓을 구매하기 앞서 시간표를 올려다보니 대구행 버스는 총총 있었다.


즉각 생각을 바꿔 대구로 돌아서 가기로 하고 차에 올라탔다.


동대구에 닿으니 12시 반도 안된 시각, 날씨 맑게 개어있는 터라 온 김에 대구 구경을 하기로 작정했다.


결혼 초기인 오래전 십수 년을 살았던 대구라 지리 어지간히 꿰기에 여기저기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혼자만의 여유를 즐겼다.

푸를 청(靑)에 담쟁이 라(蘿). 담쟁이덩굴 푸르른 대구 청라언덕.

'동무 생각'이라는 노래를 아는 이라면 청라언덕은 귀에 익은 단어다.

청라언덕이기 이전의 그곳은 가난한 조선인들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시신을 묻던 황량한 언덕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다.

백인 선교사들은 모두가 꺼리는 공동묘지인 그 땅을 사 별다른 저항 없이 건물 짓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교육, 의료 선교활동을 펼친 그들이 당시 언덕 곳곳에 심은 담쟁이덩굴에서 비롯된 청라언덕이다.

달구벌 읍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동산이라 불린 이곳에 현 동산의료원은 그렇게 뿌리를 내렸다.

동시에 계성학교와 최초의 여학교인 신명학교가 이 언덕 주변에 모이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세운 제일 교회는 그 중앙에 위풍당당한 고딕 건물 새로이 지어 위용을 자랑한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인  90 계단을 통해 청라언덕으로 올라갔다,


계성, 신명학생을 비롯한 대구고보 학생들이 대대적인 만세운동 벌이려, 서문 장날 장터로 집결하고자 쏟아져 내리던 지름길이다


옆 벽면에는 당시 현장과 생활 모습 사진과 독립운동 관련 그림이 전시돼 있다.


언덕 위 우측으로는 대구지역 최초의 교회인 제일교회가 우뚝 서있고 좌측 길을 따라가다 보면 청라언덕을 만나게 된다.


조경 잘 된 정원 곳곳에서 노랫말처럼 담쟁이덩굴과 백합화가 먼저 환대해 주었다.


이어서  동산병원 초창기의 정문 기둥과 담장 일부를 옮긴 기념 종각이 보인다.


그 옆으로 청라언덕 노래비 기다리는데  온데 만발한 하얀 꽃, 그 앞에 서있자니 진하게 스며드는 백합 향기에 어찔거릴 지경.


계성학교를 다니던 훗날의 작곡가 박태준이 사모한 깜장 교복 입은 어떤 여학생을 떠올리자 그 풋기에 미소가 번진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존슨 선교사가 미국에서 가져왔다는, 대구광역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된 가녀린 사과나무가 있다.


이 시배지로부터 대구 특산물로 새겨진 대구 능금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교사들은 세상 떠나 여기 양지바른 동산에 묻혀있으며 이들의 주택은 대구의 근대사를 담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블레어 주택은 교육사 박물관, 챔니스 주택은 의료박물관, 스윗즈 주택은 선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주택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문은 닫혀있었다. 


외관만 대강 훑어보고 박물관 관람 역시 아쉽지만 뒤로 미뤄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진기 구경은 못했으나 대신 국내 최초로 제작한 의료장비인 고압산소 치료기는 만나 보았다.


선교사가 미국에서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구의 한 공업사인 한성메디칼에서 제작했는데 이 모델이 전국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실제 이 장비로 응급실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 헤매는 환자 생명을 수없이 구해냈다니 대견해서 한참을 바라봤다.


6~70년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사신으로 불리던 연탄가스로 동치미 국물 들이켠 기억 대부분 갖고 있는 세대이니까.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지은 계명대학교다.


의료와 교육을 병행시킨 선교사들은 초창기엔 '미국 약방'을 차려 아픈 이들에게 무료로 약을 나누어 주었다.


동시에 초가집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자가 아닌 A B C D 서양식 신교육을 가르쳤으며 여식 아도 불러 따로 학습시켰다.


진료를 시작하며 '제중원'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서양 의술을 펼쳤는데 한센씨병 치료를 비롯 천연두 예방접종에 주력했다.


안내문을 읽어내리는 동안 줄곧 떠오른, 이분들에 비견되고도 남는 한 이름이 생각났다.


아프리카 톰즈에 가서 희망 잃은 아이들에게 악기를 안겨주고 인술을 펴, 더 많은 현지인 의사를 길러낸 고 이태석 신부님이다.


그분 역시 내전으로 피폐해진 남수단 톰즈에 가서 브라스 밴드를 만들고 학교를 세웠으며 병원을 지었다.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감 이전에 참다운 선교를 한 이들은 봉사활동이 아닌 그저 이웃으로 동화돼 헐벗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진심을 나눴다.


한 알 밀알로 썩은 그 바탕은 물론 크리스천 정신, 교회는 진리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개화기 당시 세운 벽돌집 셋은 지은 지 백 년이 훌쩍 넘어 대구의 근대 문화유산이 되었다.


1901년에 입국한 선교사 블레어가 살던 집으로 사람인(人) 자 모양 지붕의 2층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원형 유리창이 눈길 끄는 블레어 주택(대구유형문화재 26호)에 특히 담쟁이 무성하고 향나무도 많았다.


 붉은 벽돌 건물과 평지붕의 흰색 건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챔니스 주택(대구유형문화재 25호)은 대구읍성

철거 때 나온 돌을 주추 삼은 방갈로식 주택이다.  


선교사 챔니스뿐 아니라 같은 교단에서 세운 계성학교 교장 레이너와 동산병원의 원장인 마펫 등도 살았다고 한다.


한식과 양식을 절충시킨 벽돌 건물로 분위기 우아한 스위즈 주택(대구유형문화재 24호)은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 빛부시며

여선교사의 집답게 오밀조밀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시간 구애받지 않고 청라언덕 구석구석 거닐다보니 어언 오후 시간이 꽤 이울었다.


대구 독립운동의 발상지였던 90 계단을 내려오는데 도심 쪽 노을빛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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