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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05. 2024

탕약 향기 감도는 대구 약령시장

70년대인 오래전 대구 봉덕동에서 살았기에 시내 나가려면 반월당을 거쳐 약전시장을 지나곤 했다.

젊었던 당시야 삼계탕에 넣을 대추와 황기를 사려고 어쩌다 약전골목에 들렀을 뿐 별도로 갈 일은 없었다.

그때도 골목에 들어서면 거리 전체에서 한약 내음이 났었다.

이번에도 온데 밴 탕약 냄새가 정겹게 후각에 스며들었다.


유년기 기억이라 아련하긴 하나 낯설지 않은 한약 내음, 외가 작은할아버지 댁 사랑채엔 한약방이 차려져 있었다.


손님이 다녀간 뒤에는 달걀꾸러미나 집에서 딴 감이나 밤 등속이 놓여있기 마련이라 쪼르르 사랑채로 내닫곤 했다.


때로는 증편이나 산자가 담긴 종이 바구니가 기다려, 방 휘 휘 둘러보며 앉은자리에서 맘껏 군것질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때 작은할아버지는 간식거리를 손녀 앞으로 밀어놓고 흐뭇한 표정 지으신 채 약재를 다듬으셨다.


당시 어린 소견으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은 군입거리를 안 드시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보다 훨씬 나이 든 지금의 난, 입맛에 맞는 과일 등 요것조것 마트에서 잘도  사나르는데.


칠십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신기하게도 아직 선연한 사랑채 모습과 내음.


한문으로 쓰여있는 작은 설합이 촘촘 달린 약장부터 천정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약주머니마다 붓글씨로 약이름 적혀있었다.


안 그래도 어둑신한 사랑방, 그 안에서 가장 큰 약장이 먹감나무라 분위기 더욱 침침했다.


돌로 만든 약절구, 약작두, 약저울, 약탕기도 방안에 들어와 있었고 자물쇠로 채워진 작은 약상자는 문갑 옆 구석자리에 놓였었다.


그보다 더 또렷이 생각나는 건, 마당가에 철 따라 탐스러이 작약 피고 한들거리며 진보라와 백색으로 피어나던 도라지꽃의 추억.

원래부터 웬만하면 약을 잘 먹지 않는데 특히 양약은 일단 화학제품이다 싶어 그보다는 한약을 선호하는 편이다.


미국 살면서도 타이레놀 한 톨 복용한 적 없고 아예 소화제는 아는 이름도 없다.  


한약재는 중국산 말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는 하지만 딸내미가 한방클리닉을 하기에 나름 믿는 구석이 있긴 하다.


원래부터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곧 몸을 만든다는 주의라, 그쪽 관리에 철저한 편이고 사실 약보다는 몸의 자연치유력을 믿는 사람이다.

살짝 감기가 들면 콩나물국을 끓이고 몸살 기운이 돌면 한국마켓에서 산 쌍화탕을 따끈하게 뎁혀먹는 정도다.

그런 식으로 지금도 여전히 무작스러운 촌사람다이 민간요법에 의존하거나 한약을 찾는다.

약전시장은 오랜만에 와보니 이름부터 약령시로 바뀌어졌다.

비좁던 골목은 대로가 되고 양철지붕 허름하던 한약방은 네모반듯한 빌딩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의학 박물관 입구 정원엔 도라지꽃, 익모초꽃, 치자꽃,  당귀꽃 한창이었다.

35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대구 약령시는 예전부터 전국적으로 이름났던 곳.

명실상부한 한방 허브의 요람인 셈이다.

약령시엔 한의학 박물관과 한의원, 한약 도매상, 한의 관련 점포들이 밀집돼 있었다.

한의원 기웃거려 볼 까닭은 없으니 주저 없이 한의학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동의보감을 비롯해 여덟 종의 의학 서적을 집필한 허준선생과 이제마선생의 독창적인 사상체질을 축적시킨 우리 선대들이다.

한의학을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이자 생활의학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결의가 새겨진 한의학박물관.

규모 있게 전시실도 잘 꾸며놓았지만 무엇보다 여러 자료들이 아주 상세하게 설명문을 달고 있어서 한의사 시늉도 낼만할 정도다.

반풍수 집안 망친다 했듯 건강과 직결되는 반의사 흉내 함부로 내선 안 되겠으나, 살면서 참고하거나 도움 될만한 정보가 많았다.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한방 체험실도 마련돼 있으며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운영되었다.

약령시에 대한 연혁과 한방 역사관을 둘러보며 대구약령시를 번창시킨 결정적 요인이 몇 가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대구는 경상좌·우도 감영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좌·우도의 교통 요충지로 지역 안의 약재 등 각종 상품을 운송하기 편했다,

두 번째로 대구에 인접한 각 부·군·현이 한결같이 한약재의 명산지였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한약재는 원칙적으로 시장을 통해 조달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대구약령시는 일 년 중 춘령시(春令市) 및 추령시(秋令市)에 개최되었는데, 정선된 희귀 약재는 먼저 관에서 수매하였다.

그다음은 한의원들에서 사 가고 일반 민수용 약재는 양적으로는 가장 대량으로 거래되었다.

이후 일제의 감시로 인한 생산자·상인들의 활동이 제약과 규제로 크게 위축되었다.

대구의 유력한 한약상 양익순(梁翼淳)이 주체가 되어 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를 조직해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6·25 전쟁을 계기로 약령시는 열리지 않게 되었으며, 지금은 약전골목에서 상설 한약종상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대구 한약협회 등이 대구약령시 부활 운동을 벌여 매년 문화의 달 행사로 약령시를 대대적으로 개설하고 있다.


문화의 달에 다시 와서 한약 내음에 흠씬 젖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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