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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er Feb 04. 2022

늦은 밤 나의 집 앞 길바닥에서

새해부터 길바닥에서 잘 뻔한 슬픈 사연  



그런데 이게 뭐랄까 난

난 술 한잔하면서

괜찮은 듯 얘기하며 널 털어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 번 더 떠오른 기억에

걸음을 멈춰 서서 이렇게 울고 있어

아무도 없어서 참 다행이야


- 노을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 中 -





살다 보면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에

멘탈이 와르르 무너질 때가 있다.


노을의 슬픈 노래 가사처럼

늦은 밤 헤어진 연인의 집 근처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옛 생각에 갑자기 멘탈이 무너질 때도 있지만, 그 외에도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멘붕을 겪게 된다.


술 먹고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을 때

외국에서 지갑과 신분증을 홀라당 잃어버렸을 때

회사의 중요한 미팅 당일 늦잠 자서 지각했을 때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집에 못 들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 등등..

(이게 다 내 이야기라는 게 제일 슬프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022년 2월 2일.

늦은 밤 나의 집 앞 길바닥에서

잘 뻔한 슬픈 사연을 들려드리자 한다.





#1. 틀린 그림 찾기



나는 평소에 퇴근 후 바로 집으로 직행하는 편이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데 퇴근 후 딴 길로 샌다는 건 프로 집순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제는 평소답지 않게 퇴근하고 집 근처 마트에 들려서 장을 봤다.

일본에 있어서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낼 순 없지만 혼자서라도 설날을 기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사서 집으로 향하는 길, 양손 가득 든 짐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에너지가 샘솟는 걸 보니 역시 난 천상 집순이가 틀림없었다.


기분 좋게 집 앞 엘리베이터에 도착 후 손에 꼭 쥐고 있던 열쇠를 꺼내 들었다.

(참고로 일본은 보안이 취약한(?) 도어록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아직도 아날로그 감성 가득한 열쇠를 사용하는 집이 대부분이다.)


※ 잠깐 여기서 퀴즈! 틀린 그림 찾기 ☜(゚ヮ゚☜)
(왼쪽: BEFORE / 오른쪽: AFTER)
뭐가 다른지 맞춰 보세요!:)


오늘따라 열쇠가 좀 색달라 보인다.

뭔가 달라지긴 했는데 어디라고 바로 콕 집어내기 어다. (난 틀린 그림 찾기에 약하다.)

미용실에 다녀온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오빠, 나 어디 달라진 데 없어?'라고 물었을 때 남자 친구의 심정이 이런 기분일까?

디자인이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퇴근하고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손에 쥔 키를 들여다봤다.


뇌가 눈을 통해 전달받은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키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검은색 딱정벌레 껍데기 같은 걸로

집 현관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첫사랑 사진이라도 담겨 있어야 할 것 같은 아련한 펜던트...



#2. 장인이 만드는 황금 열쇠



따뜻하고 아늑한 집 안으로 나를 인도해줄 내 님은 어디로 가시고, 첫사랑 사진이라도 담겨 있어야 할 것 같은 던트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열쇠가 가방 어딘가에 있길 간절히 바라며,  

주식을 기도 매매하는 심정으로

가방 안에 있던 모든 짐을 다 꺼낸 후 내부를 모조리 뒤져봤지만 열쇠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오는 길에 어딘가에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집에서 마트까지 내가 왔던 길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며 마약 탐지견처럼 길바닥에 코를 박고 샅이 뒤져봤지만 열쇠는 어디에도 없었다.

(도어록은 적어도 길바닥에 떨어뜨릴 걱정은 없지 않은가..?)


평소 외출 한 번 안 하고 집에만 박혀있는 내 모습이 지긋지긋했던지, 열쇠님은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내 곁을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열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분실 신고를 하기 위해 경비실로 향했다.

멘탈을 간신히 부여잡고 침착하게 경비원분께 열쇠 분실 시 대처 방법에 대해 여쭤봤다.


그런데 맙소사...


열쇠 복사 허가를 요청하는 종이 서류를 작성해서 부동산을 통해 집주인에게 제출한 후에야 열쇠 복사를 정식으로 '의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못 말리는 종이 사랑은 이런 비상 상황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류 작성 방법을 어찌나 친절하고 꼼꼼하게 설명해주시는지, 순간 은행에서 대출 상품 설명을 듣는 줄 알았다.


인내심 있게 은행원... 아니 경비원분의 설명을 다 들은 후, 열쇠 복사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물었다.(이것보다 중요한 질문이 어디 있겠는가.)


2주 조금 넘게 걸릴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 2주요?


일본 사람들은 열쇠 하나를 만들 때도 장인 정신을 발휘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만드는 건가?

그럼 열쇠 장인께서 2주간 심혈을 기울여 열쇠를 복사하시는 동안 나는 길바닥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오....

이번 건 좀 쎈데..?


그동안 일본에 살면서 별의별 황당한 일을 다 겪어서 어느 정도 멘탈이 단련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수련이 부족했나 보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한동안 벙쪄있다가

다시 멘탈을 부여잡고, 어떻게 하면 오늘 안에 집에 들어갈 수 있지 정중하게 여쭤봤다.


우선 열쇠 대여 업체에 전화를 걸어 임시 열쇠유료로 빌려서 쓰다가,

2주 후 주문한 열쇠가 도착하면 대여했던 열쇠를 반납하면 된다고 한다.


임시 열쇠 대여료는 5천 엔(한화 약 5원),   

열쇠 복사 비용은 5만 엔(한화 약 50원) 정도란다.


처음에 설명을 들었을 땐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재차 되물었다.

열쇠를 복사하면 복사하는 거지 대여는 또 무슨 소리며, 5만 원이 열쇠 복사 비용이 아니라 대여 비용이라는 건 또 무슨 말이며,

50만 원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금액이란 말인가?

이래 봬도 일본어 학습 경력이 15년이 넘는데 이런 설명 하나 제대로 못 알아듣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열쇠 대여료는 5만 원, 

열쇠 복사 비용은 50만 원,

합쳐서 55만 원 조금 넘게 드는 게 맞았다.


자존심은 지켰지만 한 달치 월세를 잃게 생겼다.


내가 잃어버린 열쇠는 보통 열쇠가 아니라

일본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황금 열쇠였나 보다.


심지어 순금 24K 황금 열쇠보다 더 비싼 우리 집 열쇠 (출처: 신세계몰)


심지어 진짜 순금 24K 황금 열쇠보다 비싸다는 킬링 포인트다.

(잠깐.. 키보드 위에 눈물이 떨어져서.. 좀 닦아야겠다.)



#3. 찰리 채플린



열쇠의 가격을 듣자마자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동안 돈을 아끼기 위해 편의점 간편식이나 써브웨이로 끼니를 때웠던

수많은 나날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쇼핑, 외식, 여행을 멀리하며 한 달 수입의 7~80%를 아득바득 모아 왔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 참담한 심정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친한 회사 동기에게 허심탄회하게 카톡을 보냈다.


회사 동기와의 허심탄회한 카톡


인생은 멀리서 보면(남들이 볼 땐) 희극,

가까이서 보면(내가 겪을 땐) 비극이라더니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역시 찰리 채플린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재가 틀림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우울했는데 동기의 빵빵 터지는 리액션을 보니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동기에게 웃음을 선사했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미친 건가..)


사실은 내가 처한 상황이 별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재밌는 시트콤 에피소드 한 편 찍었다고 생각하자며 스스로에게 되뇌니 신기하게도

부서졌던 멘탈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냉정을 되찾자마자 일단 현재 해결해야 할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우선 경비원분께 안내받은 열쇠 업체에 전화를 걸어 임시 열쇠 대여를 신청했다.

다음으로 부동산 실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저녁 늦게 연락을 드려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한 후, 현재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드렸다. 실장님께서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집주인에게 연락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린 후 전화를 끊었다.

 

잘 가라 55만 원.. 멀리 안 나간다..



#4. 자기 합리화가 용서되는 순간



시중에 나와있는 수많은 자기 계발 서적들이 개인의 성장을 방해하는 '자기 합리화'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멘탈이 와르르 무너질 때는 자기 합리화만큼 도움 되는 것도 없다.

개인적으로 적어도 멘붕에 빠진 순간만큼은 '자기 합리화'가 용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쇠업체분이 오시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멘탈 재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 '감사하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열쇠 하나 때문에 하루 만에 한 달치 월세를 날린 일을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았다.



1. 자기 합리화


1회에 5만 원 드는 PT를 11번 받은 셈 치고, 유튜브 보면서 홈트 열심히 해서 PT 받을 때보다 더 빨리 목표 몸무게를 달성하자.


1회에 10만 원 드는 피부과 레이저 시술을 5번 정도 받은 셈 치고, 평소보다 물 많이 마시고 피부관리에 좀 더 신경 쓰자.


 인당 25~30만 원 하는 코스요리 두어 번 맛있게 먹었는데 살은 안 쪘다고 생각하자.


한 병에 20만 원 정도 하는 고급 와인을 두 세병 마셨는데 신기하게도 숙취는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하자.


헤어진 전 남자 친구와 5주만 더 늦게 헤어졌다고 생각하자.(주말 데이트 비용 1회 평균 10만 원 내외 x 5주)


이번 설 연휴에 한국 한 번 다녀왔다고 생각하자.


키 포인트 : 소비하고 나면 형태가 남지 않는 제품/서비스를 누린 셈 치기



2. 감사하기


그래도 5만 원 주고 열쇠를 빌리면 오늘 밤 길바닥에서 안 자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늦은 저녁 시간에 도움을 요청드렸음에도 친절하게 도움 주신 경비 아저씨, 열쇠업체, 부동산 실장님께 감사하자.


멘붕의 순간을 웃음으로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회사 동기에게 감사하자.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이 상황에서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지 않은 것에 감사하자.


귀갓길에 차에 치이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자.


사지가 멀쩡하고 특별히 아픈 곳 없이 건강히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자.


키 포인트 : 일단 모든 일에 감사하고 보기   


고맙다 동기야^^



다행히 9시가 조금 넘어

열쇠업체 아저씨가 도착하셨고,

나는 늦은 밤 나의 집 앞 길바닥에서 자는 일을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2주 후 주문한 열쇠가 도착하면 그땐 목줄처럼 목에 열쇠를 걸고 다녀야 할까 보다..^^)


퇴근 후 7시부터 9시까지 2일 같은 2시간이었지만 인생을 배운 2시간이었다.



오늘의 교훈 : 인생은 찰리 채플린처럼!
(올해는 숫자 2를 조심하자.^^)



To.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계실 독자분들께♥
 
두서없이 긴 아무 말 대잔치를 끝까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직 부족하고 서툰 점이 많은 데도 항상 관심 가져주시고 따뜻하게 지켜봐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ㅠㅠ
2022년 올해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시는 꿈에 가까워지는 한 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겠습니다! 저도 올해는 지난해보다 조금 더 재밌고 좋은 글로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 챙기시고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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