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저 살아갈 방법으로
음악을 골랐을 뿐이다.
그녀가 만든 작품은 원래부터
태어날 운명이었다고 단언하는,
무서우리만큼 명확하고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천재다.
일본 경제의 심장부, 마루노우치(丸の内) 빌딩가
노래를 들으면서 봐주시면 더 좋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한국에서 재생이 안되는 영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ㅠㅠ 양해 부탁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xUADBVmxiw
월급은 입사 후 계속 평행선이고
報酬は入社後並行線で
도쿄는 사랑하지만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東京は愛せど何も無い
리켄베커 620 주세요 (*일렉기타의 한 종류)
リッケン620頂戴
19만 엔도 없네 오챠노미즈
19万も持って居ない 御茶ノ水
마샬(앰프) 냄새만 맡아도 가버려서 큰일이야
マーシャルの匂いで飛んじゃって大変さ
매일 밤 절정에 다다를 뿐
毎晩絶頂に達して居るだけ
RAT 이펙터 하나를 내 장사 도구로 삼고 있지
ラット1つを商売道具にしているさ
- 마루노우치 새디스틱(丸の内サディスティック) 中 -
지방에서 도쿄로 상경한 그녀는 '마루노우치'에서 멋지게 일하는 커리어우먼을 표방하지만, 현실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파견사원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는 리켄베커 620 일렉 기타를 사러 악기상이 많은 오챠노미즈에 가지만, 19만 엔(200만 원)이나 하는 기타를 살 돈이 있을 리 없다. 방구석에서 비싼 마샬 앰프를 사용한 밴드 음악을 틀어놓고 절정에 달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타 장비라고는 싸구려 랫(RAT) 이펙터 하나가 전부다.
도쿄로 상경한 직장인 여성의 팍팍한 도시생활과 애환을 담은 <마루노우치 새디스틱>은 일본의 90년대 노래 중 최초로 빌보드 재팬 차트에서 스트리밍 누계 조회수 1억 회를 돌파한 곡이다. 이 곡은 일본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이자 록밴드 '동경사변(東京事変)'의 리더 시이나 링고가 18세 때 작곡한 노래다.
#1. 마루노우치 새디스틱
10년 전 일본 유학 시절,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1999년에 나온 곡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멜로디에 한 번 놀랐고,
팍팍한 도시 생활의 애환을 이상야릇하면서도
참신하게 표현한 가사에 두 번 놀랐고,
이 곡을 사회생활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18살짜리 소녀가 작곡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뭐든 쉽게 질려하는 성격 때문에
연예인이나 가수 덕질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나는 이 노래를 계기로 시이나 링고의 음악에 푹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중2병을 대학교 2학년 때 겪게 된 것이다.
('대 2병'이라고 해야 하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트렌디하고 힙한 한국 노래에 귀가 익숙해져 일본 노래를 거의 듣지 않고 있다가
며칠 전,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시이나 링고의 10년 전 라이브 영상을 보게 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i9I55MZLYYY
10년 전 영상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무대 매너와 그루브한 재즈풍 멜로디에 감탄을 금치 못한 나는
10년 만에 다시 시이나 링고의 음악에 푹 빠져 요즘 매일 무한반복 재생 중이다.
국내에선 우익 논란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어서 한국인으로서는 참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실제로 혐한이라고 밝혀진 바는 없다.)
아티스트로서의 음악적 재능과 천재성만 놓고 보면 적어도 내 생각에는 한국과 일본 통틀어 TOP3에 드는 뮤지션이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브런치에서 다루고 싶었던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뮤지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하마사키 아유미, 우타다 히카루와 더불어 여성 가수의 붐을 일으킨 주역,
'시이나 링고(椎名林檎)'에 대해 소개해보려 한다.
#2. 링고 이야기
시이나 링고 (출처: 군청일화(群青日和) MV)
중 3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시이나 링고는 고등학교 진학 후 다수의 밴드에서 활동하며 음악적 재능을 갈고닦았다. 밴드에서는 보통 리드 보컬이나 기타를 맡았지만 키보드, 베이스, 드럼도 다룰 줄 알았다.
링고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수많은 음반사를 찾아다니는 전형적인 인디 밴드 생활을 보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과의 진로 상담에서
하기 싫은 공부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담임 쌤의 조언(?)에 용기를 얻은 링고는 음악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도쿄로 상경한다.
(여담으로 링고에게 자퇴를 권했던 담임 쌤도 그 이후 본인이 좋아하는 일(서핑..)을 하기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인도네시아로 떠났다는 후문이다.)
1998년 스무 살의 나이에
'행복론(幸福論)'이라는 곡으로 데뷔한 링고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멜로디와
난해하지만 의미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문학적이고 은유적인 가사,
독특하고 개성 강한 보컬과 뛰어난 무대 연출력으로 수많은 덕후를 양산해냈다.
2000년대 당시 시이나 링고의 옷차림을 따라 하는 여자애들을 '링고 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링고는 당대 패션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행복론(幸福論) (1998) / 작사·작곡: 시이나 링고
시이나 링고의 데뷔곡 '행복론'은 기묘한 뮤직 비디오와 최소 인생 2회 차인 것 같은 철학적인 가사가 인상적인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55uRP4DWW0
시이나 링고의 데뷔곡, 행복론(幸福論) (1998)
진정한 행복을 찾았을 때에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강한 모습도,
당신이 숨기고 싶어 하는 약한 모습도 받아들여
시간의 흐름과 하늘의 빛깔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솔직한 얼굴로 울고 웃는 그대에게 에너지를 불태울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의외로 곁에 있어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지만
얼어붙은 내 손가락이 원하는 것이
익숙한 그 손이었다는 것을 알고서
나는 당신의 멜로디와 그 철학이나 언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생은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하늘의 빛깔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솔직한 얼굴로 울고 웃는 그대의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멜로디나 그 철학과 언어, 모든 것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당신이 그곳에 살아있다는 진실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 행복론(幸福論) -
어떻게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저런 가사를 쓸 수 있는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외에도 링고가 1990년대 후반에 만든 곡들을
들어보면 '천재'라는 말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데뷔 이후 꾸준히 천재 아티스트로 불려 온 그녀는 재즈, 록, 일렉트로닉, 팝, 보사노바 등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왔다. 보컬은 물론, 기타와 키보드,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으며 작곡, 작사, 편곡, 무대 연출까지 해내는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인 그녀는 가히 천재라 불릴만하다.
#3. 엽기적인 그녀
시이나 링고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다.
20년 전이 아니라 20시간 전에 찍은 거 아닌가요?^^ (출처: 엽기적인 그녀, 2001)
<엽기적인 그녀> 속 전지현을 보면
20년 전이 아니라 20시간 전에 찍은 영화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독보적인 매력과 분위기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엽기적인 그녀'를 전지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연기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장르가 전지현'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 속 그녀는 대체 불가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시이나 링고의 음악은 마치 <엽기적인 그녀> 속 전지현 같다.
링고가 만든 음악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노래에는 그 시대의 감성이 조금이라도 묻어나기 마련인데, 링고의 노래는 아무리 들어도 언제 만들어진 건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20년 전에 나온 링고의 노래를 들으면 20시간 전에 나온 노래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그녀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새롭고 신선하다.
링고의 음악은 재즈, 록, 팝, 일렉트로닉,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기 때문에 어떤 장르라고 딱 정의 내릴 수도 없다.
시이나 링고는
언제 들어도 세련되고 감각적인 멜로디,
귀에 착착 감기는 개성 강한 보컬,
언뜻 보기에는 난해하고 은유적이지만
의미를 찾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인 가사,
신선한 충격을 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세련된 무대 매너
그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시이나 링고'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한 마디로
'장르가 시이나 링고'인 것이다.
(장렬한 덕밍 아웃...)
#부록. 추천 플레이리스트 ♬
혹시나 여기까지 읽고 시이나 링고의 음악 세계가 조금이라도 궁금해지신 분들을 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이나 링고의 노래 몇 곡을 소개하며 마무리 짓겠다.
[JAZZ]
'기모노 입고 와인을 마시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세련된 재즈풍 노래.(출처: 유튜브 댓글)
'여자애들은 설탕과 향신료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mjclBo9gXE
여자애라면 누구라도(女の子は誰でも) (2011)
[POP]
시이나 링고가 부른 노래 중 그나마 가장 J-POP 스러운 상큼하고 밝은 곡.
내 존재가 투명인간 같이 느껴질 때 들으면 큰 위로가 되는 기분 좋은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2MHtsS4ktG8
[ROCK]
화려한 신주쿠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경쾌한 록 노래로 시이나 링고의 화려한 기타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D2mhJ3ByGQ
군청일화(群青日和) -Ideal Days For Ultramarine-(2004)
--- ※ 여기서부터는 난이도가 올라갑니다.---
[장르: 시이나 링고]
신주쿠에 위치한 환락가 가부키쵸에서 몸을 파는 여자의 인생을 담은 이 곡은 시이나 링고가 미성년자일 때 만든 노래다.
https://www.youtube.com/watch?v=krCk3EcsaxE
1999년 뮤직 비디오 공개 당시 파격적인 간호사 코스튬과 유리를 깨부수는 퍼포먼스로 큰 화제를 모은 곡. 20년 전 나온 노래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CxBHhMc7oI
종잡을 수 없는 강렬한 비트와 걸신들린 듯한 밴드 연주가 굉장히 매력적인 곡. (특히 베이스가 진심 미쳤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노래를 먼저 듣고 뮤비 봤는데 뮤비가 더 파격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x8Inb2wAl4
P.S. 저의 오덕스러움을 꾹 참고 여기까지 봐주신 천사♥ 같은 분들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제가 소개한 시이나 링고의 노래 중에 단 한 곡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곡을 발견하셨다면, 그것만으로 대성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