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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를 만드는 차

아버지와의 화해 시리즈 1

by Moon

1. 통과의례

저 녀석은 지치지도 않고 나불거린다. 부반장 수희는 도시락을 들고 반찬을 얻으러 돌아다니는 상우 패거리에게 눈을 흘겼다. 여름 방학이 겨우 2주 앞, 장마도 끝나 좁은 운동장은 날로 뽀얗게 말라가고만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그런 운동장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듯이 휴식 시간마다 공을 차면서 진득한 땀을 운동장 구석구석 주고 들어왔다. 수돗가에서 제발 목에 찬물이라도 끼얹고 들어오면 좋으련만, 딱 이마랑 손만 씻고 들어오는 통에 한 놈 한 놈 온 어깨와 등으로 운동장의 열기를 그대로 복사해 오기 일쑤였다. 그러면 이제 교실의 여자 아이들이 바싹 마를 차례였다.


5학년이 끝나가는 겨울, 6학년이 되면 학교 맨 꼭대기 층을 쓴다고 좋아했을 때, 맨 꼭대기 층은 좋지 않아, 라고 했던 엄마 말이 남자 아이들의 끈적거리는 열기로 교실이 가득 찰 때마다 와닿았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 자주 이사를 하며 돌아다니던 엄마는 집에 관해선 전문가라고 늘 자랑했는데, 그 깨달음 중 하나가 바로 꼭대기 층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복사열이 어쩌고, 보온 효과가 어쩌고 설명을 했지만, 수희는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여름엔 심하게 덥고, 겨울엔 유난히 추운 것이 맨 꼭대기 층이라는 것만 이해했다. 아무렴 어때 운동장이 한눈에 보이는데, 라고 수희는 엄마에게 대꾸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엄마 말이 정확한 예언이었다는 걸 느낀다. 축구를 마치고 들어온 남자 아이들이 4층을 걸어 올라온 것만큼의 열기까지 등짝으로 계속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쉰내만으로도 수희는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산 새 옷이 쩍쩍 달라붙는 것 같았다. 사실 그래서 오늘따라 더 신경질이 나는 수희였다.


그런 남자 아이들의 그룹 가장 선두에 상우가 있었다. 축구를 특별히 잘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달리기가 빠른 것 같지 않은 녀석인데도 남자 아이들 사이에선 대장 노릇을 했다. 공부도 못 했다. 그런데도 반장을 하는 건 또래 장난꾸러기들을 이끄는 성격과 6학년 같지 않은 입심 때문이었다. 덩치 큰 남자 아이들과 교실 뒤에 모여 앉아 알아듣기 힘든 농담을 왁자지껄 주고받았고, 엉뚱한 짓에 교무실에도 여러 번 불려 다녔다. 수희는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교무실로 불려다는 것이 어쩐지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훈장이 되는 것 같았다. 상우 그룹 아이들은 경쟁하듯이 교무실로 불려 갔다. 그렇다고 딱히 악질적인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학교 복도 벽에 화이트로 낙서하고, 6학년 수준의 싸움박질도 몇 번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선생님들을 향해 슬라이딩을 서너 번 시도하는 등의 유치한 장난질이 다였다.


그렇다고 여자 아이들에게 적대시되는 존재도 아니었다. 날마다 대상을 바꿔가며 바람둥이 같은 말 - 너 오늘 예쁘다, 머리 딴 게 귀엽다, 치마가 비싸 보인다 등 - 을 했는데, 여자 아이들은 이게 또 별로 싫지 않은 눈치였다. 학기 초부터 반 여자 아이들과 이런 식으로 친해지더니, 여름 방학 즈음에는 전교 여자 아이들이 다 상우를 아는 것 같았다. 아니, 어느 순간 상우한테 예쁘다는 말 한마디 못 들은 건 공공연한 수치거리가 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여자였지만 수희는 이런 분위기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수긍할 수 없었다. 돼지 같이 덩치만 크고, 두꺼운 안경까지 쓴 녀석에게 받는 칭찬이 도대체 뭐가 좋단 말인가? 그래서 상우가 4월 즈음인가 수희에게 와서 예쁘다, 날씬하다 칭찬을 했을 때 벌레 보듯 저리 가라고 꽥 고함을 지르곤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물론 내심 나도 이 통과의례를 비교적 이르게 거쳤다는 생각에 안도는 했지만 자신감이 높아지거나 콧대가 올라가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때 너무 매몰차게 굴었는지 상우는 지금도 수희에게만은 넉살 좋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수희는 스스로도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더 기분이 나빴다. 어쩌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상우가 어색하게 딴 곳을 쳐다볼 때면 수희는 ‘나는 남자가 싫어’라고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말 한마디 툭 던져놓고 안개처럼 다른 반 아이들 속으로 달아난 덩치 큰 상우가 수희는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2. 아빠의 안개

수희 아빠는 커다란 덩치답게 커다란 트럭을 운전했다. 새벽에 거대한 물건을 싣고 고속도로를 오갔다. 거대한 것을 싣고 나르는 아빠한테 수희랑 동생 우희를 양 어깨에 태우고 방 안을 뛰어다니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금도 사진을 보면 조그만 두 자매에 비해 아빠는 무척이나 크다. 같은 어른인 엄마와 나란히 서있는 사진에서도 아빠는 거대했다. 적어도 허망하게 죽을 사람의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수희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안개 낀 새벽 도로를 달리다가 사고가 난 것이었다. 너무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가 먼 곳으로 가셨다는 엄마의 설명에 굉장히 슬펐던 느낌만은 어렴풋하다. 어쩌면 서럽게 울고 있던 엄마를 보는 것이 슬펐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 어른들이 “아이고, 그놈의 안개는 무슨 원수를 졌다고 사람을 잡노.”라고 울음을 터트리시던 것도 생각이 난다. 그래서 수희는 지금까지 안개와 새벽이 무섭다. 공포 영화에 새벽녘의 안개 낀 숲이 자주 등장하는 건, 공포 소설을 처음 쓴 그 누군가의 아빠도 이른 아침 안개 속으로 도망갔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수희는 늘 생각했다.


자라면서 보니 엄마 역시 새벽마다 아빠처럼 어스름 속으로 매일 사라졌다. 수희는 걱정이 됐다. 엄마도 아빠처럼 안개에 잡혀갈까봐, 그 희뿌연 어딘가로 흔적을 감출까봐 겁이 났다. 참다 참다 어느 날 새벽 수희는 일찍 일어나 나가는 엄마를 붙잡았다.

“엄마, 가지 마.”

엄마는 당황해서 수희를 안아 들었다.

“엄마 가는 거 싫어?”

“응. 밖에 무서워.”

“밖이 왜 무서워? 깜깜해서? 조금 있으면 해님이 반짝 뜰 거야.”

“해님이 떠도 아빠 안 왔었잖아.”

엄마가 멈칫했다. 그리고 수희를 꼭 안았다.

“우리 수희, 엄마가 아빠처럼 없어질까봐 무섭구나?”

“응.”

“아빠랑 엄마는 수희한테 맛있는 거랑 예쁜 옷 사다 주려고 하는 거야.”

“다 필요 없어. 그냥 여기 있어 나랑. 엄마는 없어지지 마.”


엄마는 울음이 터졌다. 수희도 엄마를 안고 울었다. 엄마가 수희 눈물을 닦아주는데, 수희는 깜짝 놀랐다. 엄마 손이 옆에서 자고 있는 할머니 손처럼 딱딱했다. 처음 수희는 아빠한테 화가 났다. 이 착한 엄마 손을 이렇게 만든 건 아빠라고 결정해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수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원망하고 미워하니 슬픈 감정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친구들의 손에 들린 아빠라는 존재가 갑자기 하나도 부럽지 않게 느껴졌다.


사람의 감정이란 그 색깔이 조금씩 달라도 결국 한 머리와 한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수희는 슬픔을 억제할 수 있게 되자 곧 다른 감정을 조정하는 법도 익힐 수 있었다. 그 방법은 마음속으로 아빠한테 화를 내는 것이었다. 기뻐도 슬퍼도, 부럽거나 질투가 나도 화를 내면 모두 대체가 가능했다. 아무리 친구들이 예쁜 옷을 입고 3층 필통을 가져와 공부를 해도 수희는 부럽거나 슬프지 않았다. 엄마의 손이 더 딱딱해져도 수희는 울적하지 않았다. 수희는 잘 웃지도, 울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감정을 소모할 시간에 공부를 했다. 성적이 올랐다. 자연히, 감정을 드러내는 건 촌스런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초등학생인지라 친구들이랑 장난치며 가끔 깔깔거리긴 했지만 우는 것만큼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끔 지나치게 화를 키워 눈물이 솟구칠 때를 빼고는. 그리고 요 며칠 전 엄마가 처음으로 새 옷을 사다가 수희 머리맡에 놓고 새벽처럼 일을 나갔을 때를 빼고.


3. 상우의 구름

종이 치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반장인 상우가 일어나 차렷, 경례를 외쳤다. 이번 시간은 자연이다. 선생님은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구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물이 수천 수만 방울 뭉치면 구름이 된다는 사실을 예쁜 색색 그림까지 나오는 교육 방송을 통해 벌써 다 알아버린 수희는 심드렁했고 상우는 하늘 높은 곳에 석류처럼 열린 물풍선을 상상했다. 그걸 몽땅 땅으로 던져버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혼자 벌쭉이 웃었다. 이왕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물이 아니라 물감이나 페인트를 넣어도 될 것 같았다. 상우는 턱을 팔에 괴고 앉았다. 제대로 상상을 하기 위한 자세였다.


상상 속에서 상우는 하늘 꼭대기에 걸터앉아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4층에 있는 교실에서 운동장 반대편을 보는 것처럼 비스듬한 방향이 아니라 바로 정중앙에서 수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상상했다. 비스듬히 보면 얼굴이 보여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가능했지만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면 사람들이 둥글고 까만 머리에 두 팔 두 다리만 덜렁덜렁해서 꼴뚜기처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별 거리낌 없이 목표를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색, 파란색 페인트를 무지개처럼 땅으로 연사하던 상우는 언젠가 구름처럼 높은 곳에 올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가질 널따란 책상 한 구석에 늘 물풍선을 구비해 놓고, 이따금씩 창밖으로 던져 꼴뚜기 같은 사람들의 머리에 맞추어야지, 다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돌아와 앞에 앉은 정규에게 속삭였다.


“야, 미술 시간에 쓸 풍선 가져왔어?”

“어.”

“몇 개?”

“몰라. 그냥 문방구에서 한 봉지 사 왔어.”

“많이도 가져왔네. 그거 다 쓰지 말고 몇 개는 아껴놔, 알았지?”

“왜?"

“이따 좀 쓰게. 내 것도 아껴 놓을게.”

“알았어.”


정규의 다짐을 받은 상우는 휴식 시간이 되자 아이들한테 풍선을 조금씩 빌려 받고, 자기 것은 가방에 감춰두었다. 열 개 남짓한 풍선을 반으로 갈라 정규에게 주고 반은 자기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정규와 함께 수돗가로 가서 풍선에 물을 넣기 시작했다. 정규는 그제야 상우의 꿍꿍이를 알아차리고 신나게 자기 풍선에 물을 채워 넣었다. 둘은 다 채운 풍선을 봉지에 넣고 얼른 옥상에 올려 두었다. 교실로 뛰어 내려가니 미술 선생님이 막 들어오고 계셨다. 상우는 차렷, 경례를 외치고 자리에 앉았다. 풍선 공작을 하는 동안 상우와 정규는 번갈아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옥상에서 남은 풍선에 물을 채웠다. 이번엔 그냥 물이 아니라 물감까지 탄 물이었다. 6학년이고 방학이 다가오고 있어서 수업이 마냥 빡빡하지는 않았고,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조금 풀어주는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야, 미술 끝나자마자 옥상으로 올라와.”

“오케이.”

둘은 뒤에서 쑥덕거리고 마지막 시간인 미술 시간이 끝나자마자 가방도 가져가지 않고 부리나케 옥상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아이들이 실외화로 갈아 신는 현관 바로 위쪽에 자리를 잡았다. 곧 있으면 집으로 가는 아이들이 너도나도 현관으로 밀려와 신발을 갈아 신느라 뭉쳐있을 것이었다. 둘은 옥상 벽에 딱 붙어 아이들이 우르르 나올 때를 숨죽여 기다렸다. 손에는 이미 풍선이 두 개씩 들려있었다. 웃음이 구멍 난 풍선의 공기처럼 픽픽 새어 나왔다. 어서 시간이 갔으면 좋겠다, 둘은 같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조회가 끝났는지, 아이들이 하나 둘 현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둘은 이때다 싶어 풍선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펑펑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현관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방이나 등짝을 실눈 뜨고 조준해서 던졌지만 앞에서 물벼락을 맞은 아이들이 우왕좌왕하고 뒤에서 무슨 일인지 모르고 신발을 갈아 신으러 나오는 아이들이 엉키는 통에 이제는 아무렇게나 던져도 풍선이 얼굴과 옷과 가방에 떨어졌다. 놀란 여자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 아이들의 욕하는 소리, 저학년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우는 정규와 눈을 마주하고 키득였다. 꼭대기에서 저 아래 있는 녀석들을 울려버리니 이제야 진짜 6학년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둘은 “야!”하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봤다. 수희였다.


4. 하필 너냐

물풍선을 워낙 급히 준비한 터라 몇 개 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딱 써버리고 튈 생각이었던 상우는 당황했다. 그리고 벌겋게 젖은 수희의 머리와 옷을 보고 더 당황했다. 하필 수희라니. 이 많은 학생 중에 하필 빽빽이 수희라니. 자기가 직접 푼 물감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처음 붉은색을 보고는 ‘내가 혹시 단단한 물건을 잘못 던진 걸까?’라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다. 하지만 곧 자기가 푼 물감 중에 빨간색도 있었고, 단단한 물건을 4층 높이에서 맞은 아이가 여기까지 순식간에 뛰어올라왔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한 상우는 당당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되레 맞받아쳤다.


평소 같았으면 막 쏘아붙였을 수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계속 상우와 정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의아한 상우는 다시 수희를 쳐다봤다. 물감이 말라가던 곳에 수희의 눈물이 주룩 흐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분한 눈물이었다. 늘 학급 회의 때 반장인 상우에게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고 눈앞에서 침이 별처럼 튀도록 자기 할 말을 강하게 하던 수희가 우는 모습은 적어도 상우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아까보다 더 당황한 상우는 뒤돌아 정규를 보았다. 어느새 상우 풍선까지 다 써버린 정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울고 있는 수희를 지나쳐 그냥 뒤돌아 내려갔다. 그런 정규를 따라가기에는 수희의 분에 찬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상우는 수희를 약간 비껴간 허공 쪽을 응시하며, “뭘 또 우냐, 그까짓 거 가지고...”라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정규처럼 그냥 지나쳐 반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내 옷 물어내.”

수희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한 자 한 자 힘주어 뱉었다. 시선이 상우를 똑바로 향한 채라는 걸 상우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못 들은 척했다.

“내 옷 물어내라고!”

그냥 지나가려는 상우의 어깨를 틀어 쥔 수희가 이번엔 빠르고 크게 소리쳤다. 수희의 손톱이 어깨를 긁었는지, 날카로운 아픔이 순간 어깨 쪽에서 전달되었다. 게다가 귀 바로 가까이서 분 가득한 고함을 들으니 머리가 다 얼얼했다. 상우 역시 울컥 화가 났다.


“뭘 물어내! 그냥 가서 빨아! 그 딴 옷 얼마나 한다고!”

“뭐라고?”

수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힘껏 발을 상우에게 내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난 수희라지만 여자 아이의 발이 덩치 큰 남자 아이에게 가서 맞을 확률은 미비했다. 수희의 발길질을 얼떨결에 피한 상우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희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사이 무작정 계단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수희가 엉엉 울면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상우는 이제 놀란 선생님들까지 뛰어나와 더 아우성인 현관을 재빠르게 지나쳐 맞은편 복도 끝으로 향했다. 뒷문을 나서 문방구 옆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내달렸다. 뛰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뒤돌아보니 역시 수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제야 상우는 서서 허리를 굽혀 두 손을 무릎에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5. 추적과 덫

복도 끝에서 사라진 상우를 쫓던 수희는 상우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서 울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갛게 물들어버린 새 옷을 바라봤다.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사준 옷인데...”

엄마 생각에 수희는 또 눈물이 났다. 감정 표현에 인색한 수희지만 이건 분해도 너무 분한 일이었다. 새 옷 하나 지키지 못한 자신한테 화가 났다. 돼지 같은 상우 놈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변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수희가 엄마한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아니, 그것이 이제 엄마가 덩치 큰 남자 때문에 슬프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수희는 되돌아 아까 물풍선을 맞은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아까 상우 녀석이 가방 없이 도망갔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옥상에 빨리 올라가기 위해 가방을 교실에 놓고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수희는 다시 교실로 올라갔다. 역시나, 가방이 있었다. 공부는 하나도 안 하는 상우였지만, 가방만큼은 열심을 담은 듯 너덜거렸다. 만지기도 싫은 가방이었지만 수희는 새 옷을 위해, 아니, 엄마를 위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사체 해부 하듯이 올려놓고 가운데 지퍼를 열어 가르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서 필통을 찾은 수희는 다시 그걸 열었다. 보통 비싼 샤프 하나쯤 있을 법한데 이 녀석은 연필 두 자루에 지우개 조각 하나뿐이다. 필통을 옆으로 던져 놓고 다시 가방을 뒤진 수희는 알림장 뒤쪽에서 상우의 집주소를 발견했다.


상우 집 원앙 2동은 수희 집 원앙 3동과 정반대 편에 있다. 옷부터 빨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잠시 고민한 수희는 그래도 상우 집에 찾아가 빼도 박도 못하게 새 옷을 물어내라고 부모님께 요구하는 편이 더 확실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까 버려둔 필통과 알림장만 챙겨 자기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상우 집이 있는 원앙 2동으로 향했다. 다행히 거기에는 아는 친구들이 있었다. 주소를 보고 집을 찾기는 힘들어도 원앙 2동 사는 친구들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필통은 인질 같은 개념이었다. 상우네서 혹시나 변상을 거부하면 연필을 죄다 분질러버릴 심산이었다.


수희는 학교를 나섰다. 문방구를 지나 원앙 2동으로 가는 언덕길로 들어섰다. 다행히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아 일찍 청소를 마친 주번 아이들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수희는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다가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시내를 발견했다. 수희가 알기로 시내 역시 상우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상우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시내야!”

“수희야, 너 왜 일로 가? 이사 왔어?”

“아니. 그건 아니고...”

“뭐야. 너 옷이 왜 이래? 왜 다 젖었어? 물감도 묻었네?”

“응. 상우가 그랬어. 그래서 지금 걔네 집 가려고. 물어내라고 할 거야.”

“상우? 걔가 너한테 왜?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아냐, 그런 거. 그 돼지 같은 놈이 옥상에서 사람들한테 물풍선을 던졌어.”

“근데 걔네 집 알아?”

“몰라. 주소는 알아. 머리가 나빠서 자기 집 주소도 못 외우는지 알림장에 적어 놨더라.”

“알림장은 어떻게 봤어?”

“가방을 교실에 놓고 도망갔길래 뒤졌어.”

“아, 그랬구나. 난 또.”

“혹시 상우네 알아? 주소 보여주면 알까?”

“난 모르겠어. 주소는 봐도 모르고.”

“알겠어. 나 먼저 그럼 뛰어갈게. 어른들한테 물어보지 뭐. 안녕.”


수희는 어쩐지 자기 처지보다 상우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시내를 미련 없이 뒤로 하고 앞으로 뛰었다. 그리고 큰 슈퍼로 들어가 아줌마한테 주소를 보여주며 여기 어떻게 가냐고 물었다. 그렇게 몇 번을 물어물어 드디어 대머리산 중턱에 있는 상우네 근처를 알아냈다. 그런데 성냥갑 같은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상우네를 정확히 집어낼 수가 없었다. 대문이라고 할 것도 딱히 없는, 딱 봐도 불쌍한 집들이었다. 어쩐지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려 상우를 찾기가 민망해진 수희는 그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교실에 두고 온 가방을 찾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상우가 집에서 나오면 그때 잡으리라는 생각이었다.


6. 성냥갑 동네

악바리 같은 수희를 따돌렸다는 생각에 상우는 잠시 여유로워졌다. 그러나 곧 내일도 학교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찜찜한 기분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이내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기분 해소라도 할 겸 동네 어귀에 있는 오락실로 들어섰다. 한창 유행하고 있는 오락 앞에는 여전히 형들이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다음 차례의 주인이 자기임을 알리는 100원짜리 동전이 이미 수북이 쌓인 상태였다. 상우는 보통 동전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항상 구경을 하는 편이었고, 가끔 아는 형이 100원짜리를 하나 쥐어줬을 때 금방 쓰기가 아까워 이미 할 줄 아는 오래된 오락만 했기 때문에 최신 유행하는 게임은 할 줄 몰랐다. 그리고 워낙 공상을 좋아하는 터라 잘 하는 형들이 진행해 가는 게임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편이 훨씬 즐겁고, 경제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즐거운 공상 따위 할 시간이 없었다. 오락을 보고는 있지만 내일도 수희가 옷을 물어내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바삐 짰다. 상우 네도 옷값을 물어낼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오락 구경을 하는 둥 마는 둥 서있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다섯 시였다. 두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슬슬 집으로 들어가야겠다. 안 그러면 아빠가 일 나가시는 걸 보지 못할 것이었다.


상우는 화면에 반쯤 얼굴을 박아놓은 형들의 뒤통수에 내일 보자고 인사하고 오락실을 나갔다. 대머리산 골목 입구에 서자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그리고 습관처럼 좌우를 살피다가 앞으로 향했다. 20세기가 다 끝나가는 때에 흙이 벌겋게 날리는 길이라니! 대한민국 전체에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길은 여기 하나일 거라고, 이름도 볼품없는 ‘대머리산’의 작은 입구일 뿐이라 사람들이 이 도로가 있는지 조차 몰라서 포장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상우는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이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을 남들에게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 상우는 아빠의 존재도 부끄러웠다. 아빠는 사실 이 골목에서는 유명인이었다. 늘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농담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목소리랑 행동이 얼마나 컸던지, 골목 바로 밖에 사는 사람들조차 한두 번은 아빠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이 골목에서는 아빠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기스타였던 것이다.


어렸을 때는 상우 역시 그런 아빠가 좋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부모님 직업을 적어 내라는 가정 통신문에 아빠가 껄껄 웃으며 “아빠는 밤에 나가서 새벽까지 안개를 만드는데, 그걸 뭐라고 적어야 하지? 아, 그냥 안개쟁이라고 적자.”라고 한 다음 날부터 상우는 아빠가 창피해졌다. 선생님이 반 전체가 보는 데서 상우에게 “김상우! 안개쟁이가 도대체 뭐니? 아빠보고 장난치지 마시라고 그래! 다시 적어와!”라고 면박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 아이들은 안개 낀 날에는 상우를 보고 키득거리고, 일기예보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상우는 그런 아이들이게 주먹을 날리고 교무실로 불려 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런 상우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큰 소리로 골목 주민들과 농담 따먹기를 했고, 어느 날은 당당하게 “우리 애 학교에 글쎄 내 직업을 안개쟁이라고 적어냈지 뭐야!”라고 아저씨들끼리 와 하고 웃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에는 동네 어른들조차 상우에게 “안개쟁이 아들 아니신가!”하고 아는 척을 했다. 상우는 그런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아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골목의 아줌마 아저씨 그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원칙을 세워둔 게 있었다. 엄마의 당부이기도 했다. 아빠가 출근하는 여섯 시 전까지는 꼭 집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우가 어떤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상관은 없었다. 그저 여섯 시 아빠가 나갈 때 볼을 막 비벼대게만 해주면 되었다. 그래서 상우는 학교가 끝나고 어디서 무얼 하고 놀던 다섯 시 반까지는 집에 들어오려고 뛰었고, 6학년이 된 지금은 차라리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를 놀이터 삼기 시작했다. 교무실에 불려 갈 정도로 장난이 심해진 건 이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부터 아무리 실컷 놀아도 세 시면 끝나서 집에 갈 수 있었다.


골목 입구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상우는 조심스럽게 집을 향해 흙길을 밟고 올라갔다. 극성스러운 아줌마 아저씨들이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하긴 이 동네 어른들은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상우는 오직 한 군데 자기 집에서만 인기척이 나는 것을 느꼈다. 보나마다 출근 준비하고 있는 아빠일 터였다. 집 앞으로 간 상우는 창호지로 덧댄 단칸방의 문을 열었다. 막 밥을 차려 먹었는지, 아직 설거지를 하지 않은 밥그릇들이 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우리 아들 시간 딱 맞춰 왔네. 요 설거지는 놔두고 밥 먹고 먼저 자. 아빠가 갔다 와서 할게. 알았지?”

“됐어. 내가 할게. 얼른 가.”

“하하하. 그럴래? 우리 아들 다 컸네! 자랑해야겠다.”

“아, 좀 그러지 마! 내 얘기 좀 하지 말라고!”

“아따, 자식. 사춘기냐, 왜 버럭이야.”

“몰라. 나 숙제해야 돼. 얼른 가.”

그런 상우를 아빠는 그냥 보고 싱긋 웃었다. 상우는 아빠를 화나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거 어쩐지 약이 올랐다. 그런데 밖에서 더 약이 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야, 김상우!”


7. 한 웃음, 두 울음

수희는 멀리서 상우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바로 눈앞에 나타나 뺨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상우 녀석을 쥐어박는 것보다 이 옷을 변상받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서 상우가 중턱까지 올라와 왼쪽에서 네 번째 집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얼른 들어갈 것 같았던 상우는 방문에 서서 누군가와 한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에 동생이 있나? 2대 1은 불리한데...’ 수희는 앉아 있는 곳에서 조금 움직여 상우네 집안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아직은 밖이 환해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여전히 안쪽은 컴컴했지만 갑자기 어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아저씨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대낮부터 상우네 아빠가 집에 있는 것이라고 수희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잘 되었다. 여기서 상우네 부모님 오시기를 기다렸다가 옷값을 받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수희는 비탈길을 내려가 상우의 뒤통수에다가 “야! 김상우!”라고 소리를 쳤다.


놀란 상우가 뒤돌아보았다. 안에 있던 상우 아빠가 슬쩍 궁금한 얼굴을 내밀었다. 상우랑 똑같이 생긴 중년 아저씨였다. 큰 덩치, 안경, 능글능글한 표정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눈에 익었다. 사납게 생기거나 기가 세게 생긴 어른이 아니어서 어쩐지 수희는 자신감을 얻었다.

“내 옷 물어내!”

수희는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상우는 어쩔 줄 모르고 뒷걸음질을 쳤다.

“너... 여긴 어... 어떻게 알고...”

그 모습에 더 자신감을 얻은 수희는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바짝 상우 코앞에 서서 멱살을 틀어쥐려다 그냥 가속도를 이용해 상우 가슴팍을 밀쳤다. 상우가 너무나 힘없이 털썩 넘어졌다. 갑작스럽게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 아이의 등장에, 그리고 반도 안 되는 덩치의 그 여자 아이에게 힘없이 당하는 아들을 본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 참. 동네 창피하게스리. 일어섯, 김상우! 얘야, 넌 상우 친구니?”

“네, 안녕하세요. 상우가 제 새 옷을 물감으로 망쳐놨어요. 그래서 물어내라고 찾아왔어요.”

“야, 우리 돼지 꼬마랑은 다르게 말도 또박또박 잘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딸을 낳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하.”


그 말에 일어서 먼지를 털던 상우는 얼굴이 벌게졌고, 수희는 꼬시다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김상우, 옷값 내시지.”라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제는 도망갈 곳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우는 할 수 없이 아빠를 쳐다봤다.

“넌 이름이 뭐니?”

“수희예요. 강수희.”

“수희야, 우리 애가 나를 닮아서 장난을 심하게 치는 모양이드라. 그 옷은 얼마나 하니?”

“우리 엄마가 아끼고 아껴서 처음 사주는 거라서 비싸요.”

“그렇구나. 척 봐도 예쁜 옷이네. 한 5만 원은 하겠다, 그지?”

“5만 원 넘어요.”

“하하하. 욘석. 그래, 알겠다. 근데 아저씨가 지금 그 많은 돈이 없구나. 사실 우리 집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 형편에 상우 옷도 변변찮게 못 사주는데...”

“아빠, 그런 얘기는 왜 햇!”


상우가 말을 자르고 급히 끼어들었다. 이젠 상우의 눈에서 분한 눈물이 흘렀다. 5만 원이 아빠뿐 아니라 이 동네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액수라는 걸 상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옷 한 번 사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수희 자식의 옷은 단숨에 물어 주실 것 같은 말투인 것이 화가 났다. 수희가 너무 야속했다. 그런 찰나에 집에 옷이 별로 없다는 궁상스런 얘기를 직접 수희에게 하려는 아빠 이야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다. 저 아저씨가 이젠 자존심까지 팔려고 한다. 자기가 그냥 생각 없이 친 장난에 아빠한테 너무 큰 폐를 끼쳤다는 생각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가난한 걸 다 드러내는 아빠에 대한 미움이 뒤섞여 상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배에서 뭔가 꿈틀대고, 다리가 갈팡질팡 힘을 잃었다. 상우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울기 시작한 상우를 보고 수희는 조그마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제 보니 자기 엄마만큼이나 가난한 상우 아빠에게 돈을 받아야 하는 것도 가슴이 아프고, 그렇다고 그냥 이대로 돌아가자니 엄마가 불쌍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상우도 미웠고 집에 빨리 가려고 서둘러 일찍 학교 현관을 나섰던 자신도 미웠다. 분한 마음이 도를 넘자, 수희도 쪼그려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두 꼬마가 그렇게 한참을 울기 시작했다.


8. 동행

얼마나 지났을까, 어색하게 울음이 멎었다. 먼저 멈춘 건 수희였다. 어지간히 서러웠던지 상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남은 울음을 딸꾹질처럼 삼키기 시작했다. 방안 시계를 본 상우 아빠는 “이거 참, 이러다가 지각하겠네.”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도 두 꼬마를 이렇게 두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우야, 그만 울고. 수희야, 아저씨가 일단 지금은 일을 가야 해. 그렇지만 너한테 그 옷도 굉장히 중요한 거지?”

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우리 상우는 범인이고.”

또 끄덕였다. 상우는 자기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일단 얘기는 계속해야 하니까, 아저씨 일 하는 데 같이 가자. 이따 집에 데려다줄게. 상우도 아빠 따라와!”


수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빠 하는 일을 정확히 모르는 상우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상우와 수희의 눈이 문득 마주쳤다. 수희는 고개를 팩 돌렸다. 다시 마음속에 분이 차올랐고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아무래도 혼자 고생하는 엄마가 더 불쌍했다. 그리고 이 물감 소동에 엄마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애초에 상우가 그런 장난을 치지 않았으면 지금 이런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알겠어요, 아저씨. 같이 갈게요.”

“좋았어. 시원시원한 아가씨인 걸? 상우는?”

이미 가난한 집을 노출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상우는 수희 혼자 대단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갈 거야.”

“하긴, 범인인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녀석아.”

아빠가 살짝 꿀밤을 주며 짓궂게 말했다.


9. 안개로 씻어내기

셋은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 어느 차고지에 내렸다.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그곳에는 이상하게 생긴 차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상우와 수희는 낯선 광경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우 아빠는 둘을 사무실 구석에 앉힌 후 수희에게 집 전화번호를 물었다.

“수희야, 벌써 8시야.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야. 집에 먼저 전화를 드리는 게 어떻겠니?”

“네.”

“아저씨가 같이 가 줄게.”


수희는 차고지 사무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화를 이어받은 상우 아빠는 유쾌한 목소리로 엄마와 통화를 하고, 언제까지 수희를 데려다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몇 마디 수희 엄마와 확인의 말을 더 주고받은 그는 전화를 끊고 수희를 데리고 상우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둘을 사무실 구석에 다시 앉힌 아빠는 커피 두 잔을 자판기에서 뽑아 가져다주었다. 수희에게 커피 먹은 건 엄마께 비밀로 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그리고 다른 조그만 사무실로 들어갔다. 거기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상우 아빠는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 남자가 사무실 문에 난 창으로 수희와 상우를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우 아빠는 웃는 얼굴로 다시 두세 번 고개를 조아리더니 사무실을 나왔다.

“자, 가볼까?”

상우와 수희는 상우 아빠를 따라 그 이상하고 큰 차에 올라탔다. 안은 그러나 보통 차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이상한 조작 키가 몇 개 더 있었는데, 운전석 가까이에 있어 조수석에 탄 상우와 수희는 자세히 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둘을 들어 올려 태운 상우 아빠는 차를 돌아 운전석 쪽으로 올라탔다. 옆에 있던 비슷한 차들이 하나 둘 출발하고 상우와 수희가 타고 있던 차도 그 차들을 따라 출발했다. 차는 거리로 나섰다. 상우와 수희는 이 이상한 차에서 보는 거리 풍경에 곧 넋이 나갔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다른 높이와 속도로 거리를 보니 거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을 보더니 상우 아빠가 말을 걸었다.


“상우야. 아빠 직업이 저번에 뭐라고 그랬지?”

“안개쟁이.”

안 좋은 기억에 상우는 입을 삐죽 내밀고 대답했다. 수희는 안개란 말에 역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안개에 대한 자기의 공포심을 어떻게 알았을까,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맞아. 안개쟁이. 왜 안개쟁이인 줄 알아?”

“알 게 뭐야.”

상우 아빠는 커다란 비밀을 공개하는 것처럼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서 이야기했다. 목소리에 맞춰 목도 자라처럼 움츠리는 효과도 잊지 않았다.

“아빠는 안개를 만들기 때문이지.”

“말도 안 돼. 안개를 아빠가 어떻게 만들어?”

“곧 보여 줄게. 이 차는 안개를 만드는 차거든. 아빠만 조정할 수 있는. 자, 창문을 내리고 양 옆을 내려다봐봐.”


상우 아빠는 그러더니 운전석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차 밑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분무기를 차 밑에 여러 개 설치한 것처럼 굵으면서도 흩뿌려지는 물줄기가 쏴아 소리를 내며 나오더니 거리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바닥을 친 물이 다시 튀어 올라오면서 트럭 밑은 곧 부연 물방울들 속에 갇히게 되었다. 곧 차에서 빙글빙글 도는 빗자루 같은 것도 나와 물방울이 더 잘게 흩어지도록 도왔다. 셋이 탄 차는 희뿌연 안갯속에 갇혀버렸다.


“와아!”

두 아이는 이제까지 싸웠던 것도 잊고 신기한 장면에 탄성을 입 맞춰 내뱉었다. 젖는 것도 모르고 아래를 빼꼼 내려다보니 차는 도로를 물로 닦고 있었다. 안개를 만들고, 그 안개로 물 칠도 하고 걸레질도 하는 것이었다. 이 안개차가 지나가면 낮 동안 생긴 먼지가 물과 뭉쳐 도로변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낮 동안 이 세상을 가벼운 몸으로 부유하던 것이 타향살이였던 것인 양, 먼지는 물을 만나자 재빨리 여러 갈래의 물줄기 속으로 흩어져 어디론가 흐르기 시작했다.


“봤지? 안개 이거 아무나 못 만든다?”

불쑥, 상우 아빠가 자랑하듯 말을 꺼냈다.

“그래봐야 청소차 운전하는 거면서.”

“먼지도 없애잖아. 아빠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하는지 이젠 알겠지?”

아빠를 인정하기 싫어, 상우는 조용히 흩어지는 물방울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좋은 걸 발견하고 꼬투리를 잡았다.

“없애긴 뭘 없애. 그냥 딴 데로 물 흘려보내는 거잖아.”

“맞아. 먼지를 고향으로 보내는 거야. 제자리로.”

“제자리? 먼지의 제자리가 어딘데?”

“그야 땅이나 하늘이지. 가벼운 먼지는 물 하고 섞여 하늘로 올라가고 무거운 녀석들은 땅에 남아 흙이 되는 거야.”

반박하려니 먼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상우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절대 말로 이길 수 없는 아빠를 상우는 다시 노려보고 입을 닫았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자리를 찾는 것이라니. 아까부터 아빠와 티격태격하는 상우를 보자니 어쩐지 울적해져 말없이 창밖만 쳐다보던 수희는 거리의 먼지가 반항도 없이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먼저 안갯속으로 달아난 아빠를 떠올렸다. ‘우리 아빠도 안갯속에서 제자리를 찾게 되었는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길에 휩쓸린 먼지처럼, 아빠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던 섭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덩치만 컸지 안갯속에서는 먼지와 같았을 아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을 하니 안개에 빨려 들어가 세상을 뜨는 순간의 아빠 스스로는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하는 공감이 시작되었다. 혼자 아빠를 미워했던 게 미안했다. 죽고서도 딸한테 미움받은 아빠가 슬펐다.

‘불쌍한 우리 아빠... 불쌍한 우리 아빠...’


수희의 눈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수희는 “아빠, 아빠.”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분함이 아니라, 오랜만에 슬픔과 미안함 때문에 나오는 울음이었다. 먼지처럼 도로변 어딘가를 흐르던 아빠가 두꺼운 분노 밑에 웅크리고 있던 수희의 감정들을 건져낸 것 같았다.


10. 안개는 구름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상우 입장에서 협상은 아주 양호하게 끝났다. 차에 탄 후 한바탕 울더니 얌전해진 수희를 아빠가 멋지게 공략했던 것이다.

“수희야. 아저씨가 솔직히 말할게. 지금 상우 엄마 병원비 때문에 5만 원이란 돈이 힘이 든단다. 그래서 새 옷을 사주고 싶어도 조금 어려워. 미안하다. 대신 아저씨가 아주 깨끗하게 그 옷을 빨아 줄게. 이렇게 길거리 깨끗하게 만드는 거 보이지? 아저씨가 청소, 빨래는 전문이거든. 이거 보여 주려고 차에 같이 타자고 했어.”

수희는 상우 엄마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보다 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수희와 아빠 사이에 끼어 앉았던 상우는 아빠의 너무 솔직한 말에 처음엔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했다. 하지만 그 독한 수희는 아빠의 솔직함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빠는 집에 와서 “내가 빨기로 약속했으니, 내가 빤다!”라며 꼼꼼하게 얼룩을 지워나갔다. 상우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수희를 그렇게 가볍게 이겨버리다니. 아빠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성격이 조금은 멋있게 보였다. 상우는 아빠의 직업을 계속 ‘안개쟁이’로 적기로 했다. 아빠가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장난을 치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희와 상우는 다음 날에도 별로 아는 척 인사를 하거나 친한 척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자연 시간에 지난번 구름에 대해 배웠던 것에 이어 안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높이 떠 있으면 구름, 낮게 떠 있으면 안개라고 부릅니다. 둘은 사실 같은 것이죠.”라고 했을 때 잠깐 서로를 쳐다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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