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에게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
근 몇일 잠들기 전 보는 유튜브에서 추천해주는 영상은 대부분이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였다. 덕분에 자기 전 봉 감독이 만들어낸, 재치있으나 의미있는 문장들을 보고 들으며 역시는 역시라는 생각과 함께 왠지 심장이 두근댔다(통역사분까지 대단한 이들끼리 모여있네 라는 생각도 함께). 심상치 않았던 칸에서의 기록을 시작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르고 나니 코로나에 잠겨있었던 한국은 잠시라도 축제분위기인 듯 하다. 작품상을 수상하고 트로피를 가만히 바라보다 혼자 배실배실 웃음 짓는 감독의 모습은 나까지 기뻤다. 국뽕인지 대리만족인지 알 수 없는 몽글함이 저 밑에서 차오르면서 나에게 없는 저 사람의 불안과 강박이 때로는 얼마나 저이에게 괴물같았을까 생각을 한다.
꽤 오랫동안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유분방함으로 대표되는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는데 어쩐지 내 마음이 가는 이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가수 박효신이나, 화가 베르나르 뷔페, 그리고 '멋지다'는 말이 나오는 학계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따라가지 못하겠는 Perfectionism과 덕심을 갖고 있었다.
Perfectionism. 완벽주의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한편으로는 예민하다는 평을 들으며, 자아강도나 스트레스 대처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은 위기나 위험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사전 작업부터 꼼꼼하고 완벽에 가까울 때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그 탓에 영영 일을 시작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오래 걸려 포기하고 만다. 그렇다보니 직장에서 일하는데는 그리 좋지 못한 평을 듣는 경우도 많다. 대인관계에서 불안이 높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 유난히 새학기를 두려워하고, 환경의 변화에 예민하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인싸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사회화가 잘 되었다면 그럭저럭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울리는 듯 보이나 사실은 나의 '좁고 안락한 인간관계 네트워크'에서 머물고 싶어할 것이다. 실패를 겪으면 어떨까? 정서적으로 지지를 받기 어렵다거나 적합한 대처기술이 없는 등의 환경이 겹쳐지면 흔히 공황장애, 사회불안장애와 같은 불안 계열의 심리적 장애를 겪게 될 수 있다. 이내 우울로 진행된다면 적절한 대처 없이 극심해지는 경우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렇게 유해한 불안은 왜, 인간에게 필요한 감정인걸까.
봉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있노라면, 호모사피엔스 시절부터 그 오랜 시간 인간에게 불안이라는 감정과 함께 유발되는 강박장애가 왜 현세기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이어져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전에 한국임상심리학회에서는 지금 한국에서 괴물 취급을 당하는 조현병이나 조울증이 어떤 이유로 진화된 인간에게 남아있는가를 주제로 심리적 장애의 bright side를 탐색해 보는 심포지엄이 있었다. 창의성과 탄력성, 현실감각과 공감능력 등 심리적 장애가 진화적으로 유전되어 오는 데에는 분명한 이득이 있기 때문이라는 접근이었다. 봉 감독의 작업방식과 인터뷰를 보면, 비록 그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기에 오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안의 긍정적 이면을 제대로 찾은 느낌이었다.
봉 감독의 작업방식을 보면 꽤나 강박적인 면들이 보인다. 각본을 완성하고 시놉시스를 구상할 때 부터 그의 머릿속에 영화는 편집된 상태이다. 시놉시스에 보여지는 카메라의 각도와 배우의 위치, 표현해야 할 감정 등의 연출이 세세하게 완성되어 있다. 그 때문에 배우들은 감독이 보는 세상을 재현하듯 연기한다. 번역은 미리 염두에 둔다. 주인공의 이름은 번역되었을 때 너무 길지 않아야 하며, 인터뷰 중에도 자신이 표현하는 단어를 통역사가 어찌 표현할지 미리 걱정하기도 한다. 화면에 나오는 모든 소품과 배우의 위치는 그의 통제 아래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허술한 수사를 보여주기 위해 송강호 배우가 형사수첩으로 쓰는 농협 수첩을 단번에 알아채는 관객은 많지 않다.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새롭게 발견하며, 연출에 감탄한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얻은 봉감독은 그런 별명을 좋아하지는 않으며,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control freak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관객들은 그래서 더 열광한다.
강박은 괴물이자 선물일 것이다. 이 모든 강박에 앞서 현실감각과 대인관계 능력, 지지를 보내는 가족이 없었다면, 괴물에 잡아먹힐 듯한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 월 20만원으로 생활하더라도 덕심으로 일하는 덕후의 기질이 불안을 재능으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덕분에 그는 강박적이나 괴팍하지 않고, 수줍지만 매력적이다.
그런 이들은 아무리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해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지금의 봉감독을 생각하면 그럴 것이다. 그런데 플란다스의 개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의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무대인사에도 관객석이 얼마 차지 않았고, 감독은 작품에 아쉬운 점이 많았는지 자막이 올라가기 전 얼굴이 빨개진 채 도망치듯 자리를 나왔다고 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 개봉 전까지 지인에게 쌀을 받아 생활했고, 괴물이 상영되기 전에는 거의 다 된 계약이 엎어져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때 그는 칸과 오스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고 스콜세지 감독에게 감사를 전하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성공한 사람들의 밝은 면을 본다. 불안을 재능으로 바꾸기까지 겪어야 했을 심리적 고통은 알지도, 감히 공유하지도 못한다. 성취가 큰 만큼 어둠이 깊었을지 모른다. 때로는 이걸 계속 해야하나라는 고민이 나를 꽁꽁 묶고, 나에게 딸린 책임이 위에서 짓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대단한 성공한 사람'이 누리는 기쁨과 성취의 단 맛 뿐이다. 굳이 그의 성취와 나의 고통을 비교하고 대조하려고 한다면, 패배감은 끝도 없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한 스토리를 가진 사람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위기는 온다. 그 시기를 버티는 것은 모두에게 어렵지만 또 성장의 기회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위기인 사람들에게, 그 괴물같은 불안과 우울이 당신의 gift, 선물이자 재능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