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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원 May 16. 2019

무지개를 볼 땐 색안경을 벗을 것

문화 프로젝트 '청춘'을 진행하며

  나는 이 주제를 시작하기 전부터 ‘청춘’이란 개념에 대해 얕지만 꾸준하게 고민해왔다. 나의 젊은 시절을 최대한 후회 없이 보내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생각이 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에 다가가기가 비교적 수월했고 나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생각을 담아내기에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일련의 생각들을 이번 프로젝트에서 정리해보고 싶었고, 또 거침없이 드러내고 창조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막상 진행을 해보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각지대가 드러나고, 절대 가볍지 않았던 내 관념을 뒤집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품고 있던 생각들을 비웃으며 고치기도 했다. 쉽지는 않지만, 그 과정에서 나의 사고 메커니즘은 더욱더 풍요롭게 짙어져 갈 것이며, 조심스럽고도 대담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쯤에는 내 사고와 신념이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지라도 더욱더 단단해져 있을 것임에 확신한다.




1. 신념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보다


­

나는 ‘젊음’이라는 시간과 신체에 굴복했었다.


  2년 전부터 최근까지, 청춘에게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권리’는 하고 싶은 것을 큰 제약과 부담 없이 다양하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의무’는 사회의 공익과 타인을 위해 봉사의 개념으로 행하는 것이라 스스로 정의했다. 예를 들어 권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다음 날 아침 수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수업보다 지금 노는 것이 재미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밤새워 노는 것, 다양한 사람과 만나 깊은 우정과 사랑을 경험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나의 극한까지 몰아붙여 초월적인 경험을 해보는 것, 뜬금없이 밑도 끝도 없는 깊은 고민에 빠져 갑자기 비행기표를 끊어버리는 것, 실수해도 웃으며 즐거워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의무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드는 것,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지만 나부터 시작하는 것, 힘든 상황의 타인을 위해 나 자신까지 잠시 내려놓고 도와주는 것, 나의 목소리를 세상이 들을 수 있게 내는 것들이 있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이어진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었다. 젊은 생각과 젊은 몸을 가지고 있다면 이 권리와 의무를 누구나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한 권리는 동시에 의무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 그 권리를 행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회할 것이라 생각했고, 권리는 이름만 권리일 뿐 내 머릿속에서는 의무나 다름없었다. 물론 권리를 의무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을 나의 신념으로 삼는 것은 상관이 없다. 진짜 문제는 내가 아닌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그 의무를 씌운다는 것이다. 모든 젊은이가 그 권리(의무)와 의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20대 때는 연애를 많이 해봐야 한다.’, ‘유럽 여행을 꼭 가야 한다.’ 등 어른들의 조언을 강요라고 생각했던 내가 스스로와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굉장히 모순되고 폭력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자유로움’을 젊은이의 권리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자유로움이라는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나 보자. 그렇다면 그 자유로움은 젊은이의 것인가? 20대, 잘 쳐줘서 30대까지의 것인가? 부끄럽지만 나는 자유로운 청춘을 내 멋대로 이삼십 대로 한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치고 넘어져도 다시 털고 일어나 달릴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와 젊은 가슴이 있어야 청춘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우리 팀원들도 조금씩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 결과, 우리의 생각은 보기 좋게 뒤집혔다.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사람이(그의 나이가 어리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건강한 신체보다 건강한 정신에 있다고 답해주었다. 그 예로 어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청춘이 다 지났으며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어머니의 어머니)는 당신을 젊다고 생각하신다고 했다. 또 다른 어떤 할머님은 훌라춤 추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노인들이 함께 모여 훌라춤을 추는 노인정에는 가기 싫어하신다고 했다. 당신을 노인이라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에(그렇게 생각하기 싫으시기 때문에) 노인정이 싫으신 것이다.


  2014년에 미국의 한 영화감독이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를 찍어 개봉했다. 전쟁의 광기에 희생된 젊은 미국인의 군생활을 그려낸 영화인데, 8점 후반대의 관람객 평점과 함께 ‘극도의 긴장감에 끝까지 몰입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전쟁에서 멋지게 총을 다루는 군인의 모습이 스릴감 넘치게 담긴 영화라 나도 손에 땀을 쥐며 본 영화다. 이 영화의 감독은 영화계의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인데, 재미있는 점은 이 폭발적인 영화를 만들 당시 그의 나이는 84세였다. 다음 해 개봉한 영화 <매드 맥스>도 그 못지않게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는 영화로 유명한데, 이 영화의 감독 ‘조지 밀러’ 또한 당시 70세였다. 분명 그들의 체력은 그들보다 젊은 감독들에게 한참 밀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뜨겁고 폭발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대중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력적 힘이 정신적 힘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을까? 작년에 우리나라에서는 국내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에 오른 <버닝>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젊은 청춘들의 다양한 모습과 고뇌를 다소 무겁게 풀어낸 미스터리 장르의 영화다. (이 영화 역시 천연의 뜨거움을 지녔다.) 수많은 젊은이의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열정을 심어준 이 영화는 당시 64세였던 영화감독 ‘이창동’이 연출했다. 그의 신체적 힘은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보다 밀릴지 모른다. 하지만 오직 젊은이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젊음’에 대한 그만의 정의는 누구보다 적확하고 뜨거웠다.


  신체적 젊음이 아닌 정신적 젊음에 청춘을 담을 수 있다는 주장의 예시는 영화감독들 외에도 많다. 심지어 신체적으로는 젊은 사람 중에서도 청춘이 아닌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예시들을 접하고 나니 내가 고수하고 있던 오만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나이가 어린 사람만이 뜨거운 열정과 에너지를 갖고 있을 수 있다면 ‘노장’이나 ‘옹’이라는 말은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와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하마터면 ‘청춘’을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할 뻔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 팀은 청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인터뷰하기 위해 질문지를 만들었다. 그중에는 이런 질문도 있었다.


당신의 청춘이 무엇으로 빛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청춘을 한 단어로만 남긴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잘 만든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방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을 한 개의 단어로 출력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 질문을 통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생각할 지점을 던져주었다는 데 자부심마저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 질문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사람들은 찰나의 짧은 순간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그것이 과연 단 하나의 언어로 소화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설사 아무리 명확하고 깊은 사유를 한 사람이더라도 그 질문을 받은 당시에 하고 있던 일, 감정 상태, 컨디션, 어휘력 등 크고 작은 변수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마침 그 질문에 대한 친구의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나는 청춘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청춘이란 시절을 겪어온 내가 있을 뿐이지. 내가 살아가는 나의 순간들이 있어. 내가 좋아하는 순간도 있고, 싫어하는 순간도 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게 가볍게 미화되는 바람에 나이 든 사람들이 그걸 ‘청춘’으로 명명한다고 생각해.”


이 대답은 내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려주었다. 순간순간이 모여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그것들을 종합한 어떤 결과물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억지로 그것을 종합해 만든 결과물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의 인생과 생각을 결코 온전히 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심지어 그의 청춘을 언어로, 그마저도 단 하나의 단어로 짜내려 했다니 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몰상식했던가? 내가 했던 그 질문은 단지 딱 맞아떨어지는(것처럼 보이는) 논리적인 결과물을 내기 위한 것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부분은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스펙트럼처럼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색으로 추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성급하게 사용된 언어가 생각을 규정해버리고 프레임 속에 가둘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그런 질문은 오히려 청춘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것을 깨달은 시점부터 이번 프로젝트 결과물에 대한 가닥이 잡혔다. 이전까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듣고, 그것을 우리의 손과 입을 통해 재탄생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대답을 들은 후 생각이 바뀌었고 결과물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말랑말랑하면서 엄청나게 다양한 색깔인 ‘청춘’의 순간들이 사소한 언어 하나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남들과 똑같은 형태가 되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진행했다면 정말 재미없고 뻔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2. 당연한 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다


청춘이라면 무엇을 하든 존중받아야 할까?


  각자가 생각하는 청춘의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은 앞서 언급했던 권리나 의무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정해진 제목 없이 그저 자유롭게 청춘을 즐기며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정하고 그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춘이라는 게 정말 신체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숭고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든 타인이 그것을 이래라저래라 침범할 권한이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청춘은, 그가 무엇을 하든 다 존중받을 수 있는 걸까? ‘청춘이기 때문에’ 다 용서해야 하는 걸까?


  일단 나는 “젊을 때는 뭘 해도 괜찮다. 무엇이든 도전해볼 수 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괜찮다.”라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그 말이 어떤 현실성을 내포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을 때의 청춘에게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어 마음의 청춘을 청춘이라 생각하는 내게 저 말은 더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왜 젊을 때는 실패해도 괜찮다고 할까? 가진 것이 비교적 많지 않아서? 그 논리대로라면 나이 들었을 때는 젊을 때보다 손에 쥔 것이 많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나이 들었을 때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함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말이다. ‘이때는 이래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그 기준을 스스로 정한다면 상관없다. 그런데 그 기준이 일부 기성세대에 의해, 매체에 의해 은연중에 대중에게 강요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나는 책임감의 유무가 나이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젊어도 일부러 넘어지면(그래서 다른 사람도 넘어뜨리면) 안 되는 경우가 있고, 나이 들어도 넘어져도 되는 경우가 있다. 우선 넘어지면 안 되는 경우는 이런 것이다.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20대들이 있다. ‘YOLO’라는 사회 트렌드에 맞추어 한 번뿐인 인생을 열심히 즐기기도 한다. 물론 그것 자체는 존중과 용서의 영역에 끌어들일 필요조차 없는, 불가침 한 본인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혹은 사회에 피해를 주는 행동들은 용서받기 어렵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고용주에게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계약서는 무시한 채 ‘잠수’를 타서 영업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청춘의 무전여행’이라는 본인들에게만 설레는 명분 하에 지방으로 여행을 가서 일반 가정집에 무전으로 취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람이 많은 서울의 거리에서 실시간으로 영상 촬영을 하며 지나가는 다른 사람을 강제로 출연시키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이 무책임한 행위들은 어쩌면 무책임한 매체에서 말하는 청춘의 정의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방송, 개인 방송, 책, 소셜 미디어 등 대부분의 매체에서 청춘에게 무엇을 하든 용서가 되는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기성세대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의 논리대로라면 청춘은 신체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체 나이가 몇 살이든 상관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상관없다고 할 수 있을까? 배우자와 아이들이 있는 가장이(성별에 상관없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본인의 새로운 꿈을 찾고자 길을 떠난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의 수익으로 가계 경제가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할 때 꿈을 향한 그의 도전을 있는 그대로 놔둬야 할까? 그 청춘이 어떤 일을 하든 응원해주어야 할까?


  결론적으로 나는 이것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도전을 하는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서만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 배우자의 새로운 도전을 막을 수 있는 권리는 전혀 없다. 상대의 행위는 그 자체로 (이해는 못하더라도) 존중해야 하고,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은 온전히 나만의 것일 뿐 상대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응원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며 자기의 길을 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젊음만으로 청춘이 될 수 있을까?


  이 글의 앞부분에서 신체가 아닌 정신이 청춘을 가르는 요소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정말 정신적 젊음만으로도 청춘의 조건이 충족된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어느 정도의 체력이나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실 나는 어느 정도의 체력과 힘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신적 젊음을 만족시켜줄 두 다리가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육칠십 대를 넘기신 어르신들이 ‘제2의 청춘’이라면서 운동을 하시거나, 춤을 추시고, 공부를 시작하신다. 그런데 그분들이 즐기시는 것들 또한 사실은 지금 그 연세에서도 하실 수 있는 것들이다. 아직 가벼운 운동은 할 수 있는, 춤은 출 수 있는,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체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보다 연세를 더 드시고 몸이 좋지 않으셔서 신체 활동이 어려우신 분 중에 분명히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 젊으신 분도 계실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젊음이 신체적 젊음보다 청춘을 결정하는 데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신체적 젊음을 잠깐 잃는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젊은 신체에 젊은 마음을 갖고 뜨겁게 살아가는 이삼십 대, 심지어 십 대마저도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몸살이 나거나 장염에 걸리면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애국심이 넘치지만 부상을 입은 군인이 전선으로 나가 싸우기 어려운 것과 같다고 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정신력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아무리 아파도, 예전 같지 않아도 끝내 본인의 청춘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역사가 되어 세상에 큰 울림을 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가 그랬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회사업가가 그랬으며, 전신이 마비되어 스스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과학자가 그렇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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