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통영이기 때문
통영국제음악제는 독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아시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라고 소개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높이 평가되는 현대음악제 중 하나이다. 1999년 '윤이상 음악의 밤'과 2000년과 2001년에 열린 '통영현대음악제'를 모태로 하며, 2002년부터 매년 3월 말에서 4월 초에 걸쳐 개최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이런 설명이 없더라도 통영국제음악제는 꼭 가보고 싶었다. 유명한 연주자들도 오지만 꼭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공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리 파치의 '플렉트럼과 타악기 춤'은 여기서만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이어서 선택했고, 워크숍도 신청을 했다. 김선욱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도, 국립심포니와 마티아스 괴르네의 말러도, 세르게이 바바얀의 리사이틀도 이희문의 공연도 궁금해서 의욕적으로 예매를 했다.
이틀간 여섯 개의 공연이라니! 출발 전부터 긴장이 되었다.
통영국제음악당은 입지 하나로 다 한 듯하다. 공연 중간에 주어지는 인터미션에 로비를 걸어 나오면 탁 트인 바다와 벚꽃이 만개한 풍경에 요트들이 지나간다. 이런 풍경이라니, 일상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이곳을 방문한 보람을 절로 느낀다. 같이 간 친구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보다 낫다고 평하니 다들 통영에 가시면 음악회는 가지 않으셔도 음악당은 꼭 가보시길.
해리 파치의 특별한 악기들을 만지고 체험해 볼 수 있는 워크숍은 정말 흥미로웠다. 서양음악에서는 한 옥타브가 12 음계로 되어있는데 해리 파치는 한 옥타브를 무려 43 음계로 만들어 악기를 제작, 작곡했다. 관객으로 온 작곡가 '진은숙'님이 여러 악기들을 체험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우연히 만난 음악대학 선후배님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후배를 만난 것은 덤이었다. 다들 이렇게 시간을 내어 본인들의 업에 대한 확장을 하러 와서 만나다니 음악제는 내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었다. 동영상은 워크숍 중에 촬영한 것.
공연들은 당연히 만족스러웠지만 한 가지 큰 실수를 한 것이 있다. 관람객으로서의 컨디션을 챙기지 못하고 의욕적으로 예매한 것. 서울에 있으면서 공연 하나 보는 것도 사실 굉장히 피곤한 일인데 통영에 갔다고 없던 기운이 샘솟지는 않을 터. 공연 시간도 거의 2시간을 꽉 채우고 끝이 났는데,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협연이 있는 공연은 거의 2시간 40분을 넘겨서 끝이 났다.
통영국제음악제 기간에만 연주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상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정상급 연주자들이 각자 다른 오케스트라에 적을 두고 통영국제음악제 기간에만 모여 연주한다. 오케스트라는 연주자 개개인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합’ 이 몹시 중요하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연주도 좋았고, 김선욱은 정말 오는 잠이 깰 정도로 각성을 시켜주는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다만 2부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심포니 1번은 '아시아 초연'이라는 데서 약간 걸렸는데 역시 듣는 동안 좀 힘들었다. 살아있는 젊은 작곡가의 작품이 아닌데 아시아 초연이라는 것은 역시 그럴만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주는 좋았지만 이 곡이 왜 유난히 힘들었는지는 통영의 명물. '반다찌집'에 가서 알게 되었다.
저녁 7시에 시작해서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난 공연 시간 내내 나는 공복의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싱싱한 통영의 해물맛을 느끼며 그곳에서 만난 음악적 동지들과 시원하게 수다를 떠니 그만 세상은 금세 아름다워졌다. 밤 늦은 시간 주방 이모님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정미조의 '개여울' 부터 최백호의 노래, 경기 민요까지 부르고 나니 통영은 이제 매년 와야 할 곳이 되었다. 통영은 음악제와 반다찌집으로도 이미 충분한 방문의 이유가 된다.
피곤하고도 즐거운 밤을 보내고 이틀 째는 더 바빴다. 공연 하나를 아침부터 보고 아름답고 고즈넉한 절 '미래사'에 방문했다. 벚꽃은 도착한 첫날 만개했고 밤사이에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미래사 입구에 있는 연못에 모였다. 따스한 날씨에 분홍 연못, 동백꽃, 아름다운 사찰을 보니 통영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따스하고 만족스러운 맘으로 '세르게이 바바얀'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들어가는데 프로그램이 심상치 않다. 미리 인쇄해 둔 곡 중에 두 곡이나 검정 볼펜으로 줄이 쳐있다.
공연 시작 전에 안내 방송을 들으니 '연주자의 요청으로 두 곡을 연주하지 않으며 무대의 조도와 객석의 조도도 평상시보다 낮춥니다. 또한 커튼콜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멘트가 들린다.
싸우자는 건가... 프로그램 인쇄가 되었는데 취소라니. 그 두 곡을 꼭 들으려고 예매한 관객들과 밤새 저 프로그램지 몇 천장을 자를 대고 볼펜으로 지웠을 주최 직원들에게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무대 조도를 낮추고 커튼콜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연주자 재량이니 이해할 수 있지만 공연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예상대로 그는 연주를 잘 해냈다. (잘났으니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것이지만 기분은 역시 좋지 않았다.) 커튼콜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박수도 대충 치고 있었는데 1부와 2부에 그는 커튼콜을 했고 앙코르까지 연주했다. 이런 횡포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열렬히 박수를 친 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K- 관객의 맛! 한 번 맛보면 계속 내한하게 된다는, 정으로 가득 찬 한국 관객들에게 나는 큰 박수를 보냈다.
* 당시 방송에서는 ‘커튼콜 촬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나도 지인분들도 잘못 들었는데 아마 프로그램에서 이미 맘이 상해서 그런 것 같다. 사실 커튼콜은 요식행위라 생략하겠다는 연주자가 있다면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입장할 때 직원에게 ‘커튼콜 없습니다’로 안내 받은 지인도 있다고 하니 연주자와 음악제 행정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듯. 그래도 연주는 좋았지만 프로그램을 맘대로 생략한 것은 통보 말고 사과 한 번 해줬으면 맘이 풀렸을 듯.
* 기대했지만 취소되었던 곡 중 하나. (뒤끝 있는 관객도 있음)
https://www.youtube.com/watch?v=7gfZf92Hg34
밖으로 이동할 시간도 없어 음악당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마지막 공연인 '이희문의 날'프로젝트를 기다렸다. 이 공연을 초연부터 5번을 보았지만 통영국제음악제에 초청받은 이희문은 더 기대가 되었다. 원공연보다는 짧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통영에서 클래식 애호가들이 이희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곡가 진은숙 님은 친절하게도 이희문 님이 로비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관객들에게 '이제 곧 나오신다'며 알려주시기도 했다. 진은숙 님은 모든 공연을 거의 다 보신 것 같아 존경스러웠고, 오며 가며 자주 뵐 수 있어서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통영의 밤은 내게는 저물었지만 내년의 통영국제음악제를 기다린다.
그 축제가 통영에 있다. 통영의 봄이 이미 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