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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Aug 25. 2020

그래도 건네 보자. 두 번째 음료 캔

인생은 아름다워(1997)



Good humor isn't a trait of character,
it is an art which requires practice.
좋은 유머는 성격의 특성이 아니라, 연습이 필요한 예술이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시베리>


"그거 어디서 났어?"

"동전 모아 샀다."


먹을 것이라곤 수돗물뿐이던 어느 아침, 어딜 다녀온 건지 룸메이트 형이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과일 주스 캔이 들려있었는데 뚜껑이 따인 것으로 보아 남은 양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던 입속으로 달큼 새콤한 냉수를 쏟는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형에게 직선으로 날아가 캔을 낚아챘다.


"널 위해 반만 마셨다."


형의 생색을 뒤로하고 캔 속의 음료를 빨아들였다. 주먹 남짓한 크기에 담겨있던 과실액은 입에 닿기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빈 캔을 바라보고 있자니 몇 초전 과거가 그리울 정도.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형이 주스를 또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원래 두 개였어."


그는 '이건 사실 내 건데 너니까 특별히 줄게'라며 남은 음료수를 다시 건네줬다. 웃음 참느라 얼굴은 부풀어서는. 참나.


삶이 피로해지면 그때가 생각나곤 한다. 참 힘든 시기였는데, 그는 당시의 상황을 괜스레 비관하거나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았다. 틈나면 '음료 캔 사건' 같은 해프닝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런 순간들이 모여 꽤나 강력한 버팀목이 생긴 것 같다. 


이따금 아픈 진실을 달리 표현하려는 시도는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유머로서의 가치가 있다. 당시 나는 그가 남겨준 두 번째 음료 캔을 마치 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풍족하게 마실 수 있었다. 처음부터 두 개란 걸 알았다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방어기제로써의 유머는 '고통스럽고 불안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유머는 나를 위해 시도하는 기제라고 볼 수 있다. 유머를 통해 어떤 현상이 주는 긴장이나 고통을 완화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유머는 상대방을 위해 시도할 수도 있다. 나 역시 불안하고 힘든 상황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방을 위해 사용하는 유머는 '사랑'을 담게 된다.


사랑의 유머를 배우고 싶다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를 만나보자. 방어기제 '유머'의 대표적인 사례로 다뤄질 만큼 그의 유머는 삶과 닿아있다. 사랑을 담고 있다.


귀도의 일상

귀도는 고장 난 차를 몰아 비탈길을 질주하며 등장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고뭉치. 누군가의 머리에 날계란을 터뜨려 하루를 망치는가 하면, 장학사인척 연기하다가 아이들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기도 한다. 부모들이 봤다면 머리끄덩이 잡히고도 남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의 집 열쇠를 낚아채기도 한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은 놀라울 정도로 낙천적이다. 주변인이었다면 친하게 지내긴 어려웠을 듯.


귀도의 사랑

그럼에도 귀도를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사랑을 하는 방식이 매우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를 보며 '기차에 왜 의자가 없냐'며 툴툴거리는 아들 조수아에게 '안 타본 티가 폴폴 난다'며 놀린다. 기차는 본래 빽빽하게 서서 타는 거라고, 아슬아슬하게 표를 샀으니 잽싸게 타라고. 그리곤 기차를 타기 전 독일군에게 외친다. "기다려요. 우리도 예약했어요!" 수용소에 도착 후, 기차가 힘들었다는 조수아에게 집에 갈 때는 버스를 타자고 한다. 그리곤 또다시 독일군을 향해 외친다.


"갈 때는 버스로 준비해주세요! 의자가 있는 걸로요."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아들을 위한 사랑을 이어간다. 귀도의 유머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고 있는지, 수용소에서의 귀도와 조수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각자의 이야기를 비교해보자.


"1000점을 따면 탱크를 준다고?" - 조수아


처음엔 무서웠다. 파란 눈의 군인들이 우리를 기차에 태웠다. 문을 닫자 차내는 어둠으로 뒤덮였다. 아버지가 원래 이렇게 타는 거라고 하셨다. 한참 뒤 기차는 차갑고 음습한 건물의 울타리로 들어섰다. 그곳엔 더 많은 군인들이 있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났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줄지어 걸었다. 건물의 문을 열자 같은 복장의 사람들이 하나 된 표정으로 우릴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색은 잿빛에 가까웠고 줄무늬 옷은 흑백의 경계를 알기 어려울 만큼 더러웠다. 그들이 겁에 질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섭고 힘든 상황에 놓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익은 고기를 목전에 둔 개처럼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셨다. '드디어 이 게임을 하게 되다니 너무 신난다'라고 하신다. 의아했다. 이게 게임이라고? 잠시 후 파란 눈의 군인들이 방으로 들어왔고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았다. 아버지가 손을 슬쩍 들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독일어를 할 줄 아셨던가?


아버지가 군인의 외침을 큰 소리로 통역했다. 놀랍게도 그곳은 정교하게 구성된 게임장이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1000점을 먼저 모으면 우승자가 된다. 우승 상품은 자그마치 탱크라고 했다. 장난감 모형이 아닌 실제 탱크! 꼴찌는 등에 '멍청이'라는 쪽지를 붙이고 다녀야 한다. 


파란 눈 군인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들이 무서운 얼굴로 소리치는 이유는 그런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막대사탕을 20개나 먹고 배탈 난 얘기를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얘기했는지 모르겠다. 맛도 끝내줬다면서.


배고프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아버지와 나는 빠른 속도로 점수를 쌓았다. 높은 점수를 얻을수록 그곳은 더 소란스러워졌다. 아버지는 우리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모두들 우릴 찾고 있다고 하셨다. 나만 잘 숨어 있으면 우승은 자연히 우리 것이 된다. 기나긴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절대 들키면 안 된다던 아버지의 작전을 되새기며 열심히 숨어있었다. 결국 우린 우승자가 됐다. 탱크를 탔다. 엄마도 다시 만났다. 아버지와의 가장 즐거웠던, 그리고 또렷한 추억이다.


"우리 가족 모두 살아서 돌아간다." - 귀도


그렇게 무거운 쇳덩이는 들어본 적이 없다. 목적지까지 옮길 자신이 없었다. 멈춰 서자 뒤따라오던 바르텔메오가 '멈추면 총살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바닥 깊이 고여있는 생명을 쥐어짰다. 밤새 그 쇳덩이를 옮겼다.


숙소로 돌아가자 숨어있던 조수아가 반기며 뛰어온다. 내 보물. 지친 모습을 보자 아이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난다. 아니야, 조수아. 이 게임 생각보다 정교해. 밤새 땅따먹기를 했고 아빠는 50점을 땄어. 아니, 넘어져서 2점을 뺏겼어. 얼마나 웃었는지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어. 빨리 내일이 와서 또 했으면 좋겠다. 땅따먹기, 줄다리기, 원 그리기... 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다음 날, 조수아가 울상을 하고 있다. 뭔가를 우연히 듣게 됐단다. 우리를 불에 태워 땔감으로 쓰고 단추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기 무섭게 박장대소를 했다. 아니야, 조수아. 이 교활한 여우들 같으니라고. 너 그 말을 믿었어? 널 겁줘서 점수를 뺏어가려는 거잖아. 생각해봐. 나는 단추 하나를 바닥에 떨궜다. 내 친구 조르지오가 바닥에 떨어졌네? 조르지오에게 인사해. 조수아와 나는 한참을 웃었다.


전쟁이 끝났다. 독일군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수감자들을 트럭에 태운 후 어디론가 옮겼다. 수용소를 나선 트럭은 이내 빈 차로 돌아왔다. 아내를 찾아서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조수아를 안전한 곳에 숨겼다. 조수아, 이제 마지막 게임이야. 이번만 우리가 득점하면 우승할 수 있어. 아이의 눈이 영롱하게 빛난다. 조수아, 내가 안 오더라도 주변이 조용해지기 전까진 나오면 안 돼. 아이가 입을 앙다문다. 우승을 하고 싶은가 보다. 아이를 두고 떠난다. 도라를 찾아야 한다. 우리 가족 모두,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유머는 사랑을 싣고


수용소에서의 삶은 참담했다. 숙부님은 도착하기 무섭게 시체더미의 일부가 됐고 아내의 생사는 확인조차 어려운 상황. 언제 그들에게 끌려가 죽게 될지 모른다. 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잿더미가 됐다. 밤에는 척추가 으스러질 것 같은 쇳덩이를 옮겨야 했는데 힘이 빠지는 순간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얼굴 근육을 올리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척박한 수용소에서의 유별나되 일관적인 유머가, 그 사랑이, 인생은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야 만다.


여전히 해야 할 일 투성이인 복잡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내일은 답답하고 다음 주는 텁텁하고 내년은 막막하다. 허나 어쩌면 우리의 현재 역시 시대를 관통하는 귀도의 방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이들이 누군지 알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생각했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유머를 시도했다.


자취 시절 룸메이트 형이 건넨 두 번째 음료 캔은 나에게 있어 귀도의 유머였던 것 같다. 그런 장난들이 모여 어려운 상황을 조금은 익살스럽게 바꿔줬으니까. 힘든 상황을 겪다 보면, 우리는 그것을 진지하게 직면하고 타개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해결된 사건이나 가슴 뜨겁게 행복한 순간보다는 고독하고 고단한 일상이 인생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대단히 대단한 행복'보다는 그저 반복되는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아름다운 인생의 열쇠는 아닐까. 


결국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끌려가는 귀도의 모습을 숨어있던 조수아가 보게 된다.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향해 윙크를 하고는 큰 동작으로 행진을 하여 조수아를 웃음 짓게 한다. 귀도의 마지막 유머는 그의 인생에 길이 남을만한 역작이지만, 한편으론 고독하기 그지없는 일상이었을 뿐이다. 


가끔은 내 상황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싱거운 농담 한 번 뱉어보는 게 어떨까. 같은 고통 속에서 실눈을 뜨고 있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툭. 던져보는 것. 웃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건네 보자. 두 번째 음료 캔.




왕고래 / 작가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어요.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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