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왓챠 WATCHA Aug 27. 2020

돈도, 집도, 취향도 없으면 어쩌죠

소공녀(2017)



언젠가부터 소주를 안 먹게 됐다. 생각해보니 정확히 취직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고부터다. 알바를 할 때만 해도 소주를 먹었는데 정규직으로 취업을 한 후부터 소주를 먹지 않았다. 소맥을 먹을지언정. 


생각해보면 사실 원래 소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숙취가 심해서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취업 전까지 소주를 먹어야만 했던 건 돈이 없어서였다. 대학에서 선후배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맥주를 시키는 건 너무나 사치였고 그나마 조금 기분을 낸다 싶을 때 선택지가 레몬 소주였다. 소규모 술자리에서 가끔 칵테일을 먹은 적도 있지만 그것도 드문 일이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소주, 맥주 말고도 맛있는 비싼 술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위스키, 와인, 전통술, 프리미엄 막걸리, 크래프트 비어... 맛도 향도 다양하고 다음 날 숙취도 덜했다. 그래서 더 이상 소주를 찾지 않게 됐다. 


얼마 전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의 단골 위스키 바였던 서촌의 그 위스키 바에 오랜만에 가서 술을 두 잔 사 먹었다. 돈을 벌고 더 이상 소주를 먹지 않는 나지만, 그런 나에게도 부담 없는 가격은 아니었다. 위스키 2잔이면 와인 한 병 정도, 소주는 8병을 족히 마실 수 있다. 친구들과 위스키를 마시려면 내가 사겠다고 호기롭게 말은 못 하고 각자 돈을 내자고 미리 얘기를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새삼 미소의 취향에 감탄하게 됐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참 많이 회자되는 캐릭터다. ‘요즘 청춘’에 대한 얘기를 할 때 한국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부동산은 계속 오르는 와중에, 집세가 없어서 방을 빼고 친구 집을 전전하는 미소가 부동산 관련 기사에 요즘도 종종 소환된다. 


일당 45000원을 받는 가사 도우미 알바를 하면서, 집세가 올라도 담배, 위스키, 애인만 있으면 괜찮다는 미소라는 캐릭터는 ‘아 요즘 친구들은 저런가 봐?’ 하는 충격을 준 모양이다. 


노숙자의 몰골이 따로 없지만 특유의 패션센스(?)로 온갖 옷을 레이어드 해서 입고 다니면서 옛 동아리 친구들의 집을 찾아 신세를 지지만 항상 자신에게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신선하다. 


내게 미소는 사실 ‘사기캐’ 같은 느낌이다. 

내가 미소처럼 좀 더 어릴 때부터 진작 위스키 맛을 알았다면 그렇게 소주를 마시며 토하고 다니진 않았을 텐데...

내겐 위스키 맛을 알 수 있는 돈도 없었지만 그런 취향을 가르쳐줄 지인도 문화적 지식도 부족했다. 결국 나 같은 사람은 어쨌든 취직을 해야만 위스키 맛을 알 수 있었다. 


집과 돈이 없어도 취향은 있는 게 미소라는 사람인데, 솔직히 돈과 집이 없으면 취향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돈이 생기고 나서야 위스키뿐 아니라 미술, 영화, 인테리어 등등 기존에는 전혀 몰랐던 즐거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됐다. 취향이라는 것도 그렇게 돈을 벌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생겨났다. 돈이 없어도 취향이 있었으면 진작 더 행복했겠지만 간접체험으로 취향을 쌓기란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돈이 없어도 좀 더 순수했고, 더 많은 가능성이 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아니다. 다시 돌아가 봤자 취향이 부족한 나는 또 소주를 먹고 있을 텐데-지금 좀 더 늙고 항상 지쳐있지만 그래도 뭐가 좋은지 알고, 좋아하는 걸 살 수 있는 지금이 더 좋다. 


요즘 같은 시대엔 물질 빈곤보다 취향 빈곤이 어쩌면 진정한 도태라는 생각을 한다. 돈 없어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영상 콘텐츠들도 충분히 많고 매일 같이 새로 생겨나지만, 그런 영상과 글을 잘 찾아내서 즐기는 것 또한 능력이 됐다. 취향도 부지런하고 똑똑하지 않으면 쌓기가 쉽지 않다. 


서촌의 미소 단골 위스키 바에는 이제 대기 없이 들어가기 쉽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이제 소주 대신 위스키를 사 먹으면서 종종 생각한다. 미소라면, 이제 또 다른 술을 먹진 않을까. 고작 영화가 나온 지 2년이 흘렀지만 지금의 미소 같은 친구들은 이제 또 다른 더 맛있는 술을 먹는 게 아닐까. 


취향의 빈곤이 이렇게 무섭다. 내 취향이 구릴까 봐, 힙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봐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취직을 하고 나서야 위스키 맛을 알았듯, 나 같은 사람은 계속 물질적 도약을 해야만 취향도 한 단계 올라가는 게 아닐까 하고. 



소공녀, 지금 보러 갈까요?


최유빈 / KBS 라디오 PD


매일 음악을 듣는 게 일입니다. 0시부터 2시까지 심야 라디오 '설레는 밤'을 연출하고 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정적인 카메라워크가 알려주는 화면 속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