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로 읽는 재즈 4
“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인이 들어 있는 [Sketches of Spain]을 가지고 있다.” 오랜만에 [태엽 감는 새]를 다시 읽다가 우와 하고 소리쳤다. 20여 년 전에는 아무 의미 없던 이 문장이 큼직한 활자체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책을 덮고 현실적인 생각에 빠졌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인이 있는 [Sketches of Spain]이 존재했었나? 중고가도 꽤 나갈 텐데 얼마나 될까?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야 이 문장이 뜬금없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의 화자(話者) 오카다 토오루는, 자신은 평범하지만 특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맥박이 꽤 느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형제 이름을 모두 외우며,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인이 있는 [Sketches of Spain]을 가지고 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프린스턴 대학에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1991년부터 93년까지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 머물게 된다. 프린스턴 대학은 그가 흠모하는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모교이자 2008년 명예 학위를 받게 되는 곳이다.
재즈 카페를 접은 뒤 한동안 재즈를 듣지 않았던 하루키는 미국에 거주하며 다시 재즈를 만끽한다. 중고 레코드 가게를 돌아다니며 재즈 LP를 수집하고, 재즈 클럽에서 라이브를 보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자서전 [마일스]를 감탄하며 읽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두 편의 장편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태엽 감는 새]를 집필한다.
1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 [태엽 감는 새]는 1995년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고 전세계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는 등 하루키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로시니의 [도둑까치]를 비롯해 슈만 [숲의 정경] 중 ‘예언하는 새’,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새잡이 사내’ 등 클래식이 주요 테마로 흐른다. 각각은 1~3부의 부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클래식처럼 정교하고 꽉 짜인 작품을 쓰는 동안에도, 하루키는 다시 재즈 듣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마일스 데이비스, 에릭 돌피, 알버트 아일러, 돈 체리, 세실 테일러 같은 이름이 툭툭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한편, [태엽 감는 새]에서 덜어낸 넉 장 분량의 원고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라는 장편소설로 확장되었다. 이 소설은 평단에서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하루키와 재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냇 킹 콜의 ‘South of The Border’와 듀크 엘링턴의 ‘The Star Crossed Lovers’가 모티프가 되고, 주인공 나(하지메)는 테너 색소포니스트 일리노이 자켓의 ‘Robbin’s Nest’에서 이름을 딴 재즈 클럽 ‘로빈스 네스트’를 운영하는 등 그야말로 재즈에 흠뻑 빠진 채 쓴 소설이다.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에서 마일스 데이비스를 자주 언급했다.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A Gal in Calico’를 시작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Bag’s Groove’, 단편 [헛간을 태우다]의 ‘Airegin’ 등이 흐르고 [노르웨이의 숲]의 [Kind of Blue]처럼 앨범을 듣기도 한다. 단편 [렉싱턴의 유령]에서는 강아지 이름이 ’마일스‘다. 그러니 [Sketches of Spain]이 언급되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사인이 있는 앨범이라니. 어쩌면 재즈 LP 수집에 몰두하던 하루키가 그 앨범을 발견하고 쓴 문장은 아닐까? 구글링으로 단서를 얻어 소설을 한 편 써본다.
프린스턴 인근 중고 레코드 가게를 드나들던 하루키는 주인으로부터 솔깃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봐요, 하루키 씨. 이건 아무나 보여주는 게 아닌데, 얼마 전에 마일스 데이비스 사인이 있는 [Sketches of Spain]을 입수했어요. 그는 보통 마일스(Miles)나 마일스 D(Miles D)로 쓰잖아요. 그런데 이건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풀 네임 서명이라구요.” 두 재즈광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인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주인이 다시 말을 잇는다. “1984년 3월 LA 아이비 레스토랑에서 직접 받았대요. 70년대 콜롬비아 판으로 상태도 A급이라구요. 대단하죠? 이런 앨범은 750달러는 되어야...” 이어지는 말에 하루키는 두 말 없이 마음을 접는다. 그에게 중고 LP ‘7달러는 어려운 선’이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아른거리는 사인 앨범은 뜬금없는 문장으로 튀어나온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1959년 여름, 재즈 역사상 최고의 명반이 될 [Kind of Blue]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 후속 작이 길 에반스와 함께 한 [Sketches of Spain](1959년 11월 15일과 20일, 60년 3월 10일 녹음)이었다. 중후한 첫 곡 ‘Concierto de Aranjuez’는 에스파냐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즈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를 재즈로 편곡한 것이다. 짐 홀, 파코 데 루시아, 모던 재즈 쿼텟 등 여러 버전이 있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단연 [Sketches of Spain]이다.
그들이 [Sketches of Spain]을 발표했을 당시에는 재즈적인 요소가 적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로드리고(1999년 사망) 역시 길 에반스 편곡으로 로열티는 많이 받았지만 연주에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래미어워드 최우수 오리지널 작곡상을 수상했고 “유례없는 우아함과 서정성을 지닌 작품” “관현악 재즈의 새로운 방향” 같은 호평을 받았다. 이는 시간이 흘러 재즈와 클래식을 결합한 서드스트림의 명반이라는 평가로 이어지게 된다. (마일스 데이비스 ‘Concierto de Aranjuez’ https://youtu.be/2cscpJisU6k)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1992)과 [태엽 감는 새](1994),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1959)와 [Sketches of Spain](1960)은 각각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태엽 감는 새]와 [Kind of Blue]가 그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고 그 전후로 탄생한 것이 두 작품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처럼 [Sketches of Spain] 역시 처음부터 완전한 작품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었다. ‘Concierto de Aranjuez’만을 연주할 계획이었지만 스페인에서 듣게 된 여러 민속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앨범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은 강렬한 테마에 비해 전체적인 완성도는 아쉽다. 재즈가 강하게 각인되지만 남는 건 정사 씬 밖에 없다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나, 16분 20초에 이르는 첫 곡 외에는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Sketches of Spain]은 소위 ‘뒷심’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건 다시 재즈를 만끽한 무라카미 하루키와 스페인 음악에 감탄한 마일스 데이비스-길 에반스의, 순수한 기쁨이 만들어낸 강렬함이 아니었을까. (재즈피플 2019년 8월호)
[Sketches of Spain]
Columbia / 1960
Miles Davis (tp/ flh), Johnny Coles, Bernie Glow, Taft Jordan, Louis Mucci, Ernie Royal (tp), Dick Hixon, Frank Rehak (tb), Bill Barber, Jimmy McAllister (tuba), John Barrows, James Buffington, Earl Chapin, Joe Singer, Tony Miranda (french horn), Harold Feldman (cl/ fl/ oboe), Danny Bank (bcl), Albert Block, Eddie Caine (fl), Paul Chambers (b), Jimmy Cobb (ds), Elvin Jones, Jose Mangual (per), Jack Knitzer (bassoon), Romeo Penque (oboe), Janet Putnam (harp), Gil Evans (arr/ conductor)
1. Concierto de Aranjuez (Adagio)
2. Will o' the Wisp
3. The Pan Piper (Alborada de Vigo)
4. Saeta
5. Sol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