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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즈하루 Jun 10. 2019

재즈를 잊은 당신에게 #3

나의 이야기가 찾아내는 재즈를 듣는다

#3 나의 이야기가 찾아내는 재즈를 듣는다 


육아를 하며 지치고 헛헛한 마음에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누구보다 내 마음을 먼저 치유하고 싶어 시작한 독서치료와 상담심리다. 지난 학기에는 ‘성격심리’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말 그대로 사람의 성격(性格)을 탐구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유전적 환경적 영향을 받아 성격이 형성되고 그것이 다시 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떠올리면 성격이란 참 중요하고도 흥미롭다. 




키스 자렛의 피아노와 김환기의 점으로 가득한 세계


내가 다니는 사이버대학은 동영상으로 강의를 듣고 인터넷으로 시험과 과제를 치른다. 성격심리 수업에서는 자신의 절정경험을 쓰고 다른 사람들의 글에 댓글을 다는 토론 과제가 주어졌다. 


절정겸험(Peak Experiences)은 욕구의 5단계이론(생리적, 안전, 소속감과 사랑, 존중, 자아실현 욕구)을 정립한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중요한 이론 가운데 하나다. “강렬한 느낌이나 신념 같은 것으로 무제한의 지평선이 열리는 듯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아의 지경을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렬하면서도 더욱 무기력한 것을 동시에 느끼며 관습적 의미의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다. 자연, 음악을 접할 때 많이 느낄 수 있다”(성격심리 강의록 중) 이렇게 글로 읽으면 잘 와 닿지 않지만 재즈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절정경험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재즈를 듣다가 소름이 돋거나 음악과 하나 되는 느낌, 좀 더 쉽게 말해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이 바로 절정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토론 과제는 다음과 같았다.  


아마도, 봄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고, 공기엔 봄을 머금고 있었고, 한낮에는 약간의 더위가 느껴졌다. 바쁜 일을 끝내고 하루 휴가를 내어 부암동 환기미술관을 찾은 날이었다. 부암동 큰 도로에서 아랫길로 조금 걸어 내려오면 찾을 수 있는 환기미술관은 김환기 화백의 작품처럼 모던하고 쾌적하다. 그곳 3층에는 김환기의 뉴욕시대(1963-74)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운 마음, 외로운 마음, 고마운 마음, 쓸쓸한 마음... 김환기는 마음속에 몰아치는 그 마음을 하나하나 점에 담았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작품을 바라보다 이어폰을 꽂고, 키스 자렛의 [The Koln Concert]를 틀었다. ‘Part 1’을 들을 때면 상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이 김환기의 작품과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그때, 나의 세계는 키스 자렛의 피아노와 김환기의 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키스 자렛이 페달을 밟으며 건반을 누를 때마다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는 것 같았다. 그에 맞춰 김환기의 점들은 반원을 이루며 하늘로 끝없이 펼쳐져 올라갔다.


과제를 하면서는 생각이 글로 표현되지 않아 힘들었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쾰른 콘서트’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만을 생각할 수 있어서 기뻤다. 


연주자에게서 태어나 감상자에게서 자란다


사실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 2017년 대학수능력시험 영어 지문으로도 출제되었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1975년 독일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기획 일을 하는 17세 소년 에릭 브란데스는 키스 자렛의 단독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연은 이미 매진되었으나 공연 당일 키스 자렛과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는 공연장에 있는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두고 난색을 표했다. 키스 자렛은 공연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최고의 피아노는 구할 수 없었고 공연을 망치게 된 에릭 브란데스는 그저 빗속에 서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키스 자렛은 할 수 없이 무대에 올랐다. 지문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피아노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남을 연주를 선보였다. 피아노의 부족한 울림을 극복하기 위해 그의 왼손으로 엄청난 음량으로 반복적인 베이스 리프를 연주했다. 발코니석에까지 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 키스는 피아노를 정말 강하게 연주해야 했다. 키스는 일어섰다가 앉으며 불가능한 피아노를 연주해 독창적인 연주를 했다.”(주간경향 1211호 정희윤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하늘을 걷듯 날아오르는 연주는 부족한 울림을 극복하기 위해 꾹꾹 눌러 연주했던 반복적인 베이스 리프였다. 키스 자렛의 신음은 그의 습관에 극심한 체력소모가 더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 에피소드로 인해 음악의 감동이 줄어드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연주자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고 과장된 감정을 덧칠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음악이란 연주자에게 태어나 감상자로부터 자라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키스 자렛도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절정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없었을 테니까.  


이야기로 다가오는 재즈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절정경험이라는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내가 음악과 관계를 맺는 일상적인 감정에 대해서다. 나는 오랫동안 글을 만지며 살아왔다. 그런데 글을 쓰지 않게 되었을 때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쉬었기 때문에 감각이 떨어진 게 아니라 애초에 쓸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성격과 재즈라는 음악적 특성이 더해진 것일까. 가사 하나에 울고 웃는 가요와 달리 재즈는 연주가 대부분이고 그것마저도 이야기보다는 연주 자체를 중심으로 작곡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라고 단정하고 음악 자체를 들으려 애썼을 뿐 이야기를 찾거나 들으려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키스 자렛의 음악에서 절정경험을 한 것은 그 자체의 몰입도 있었지만 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난 김에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를 꺼내들었다. 빌 에반스가 조카 데비와 함께 언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썼다는 곡이다. 사랑스럽고 발랄한 꼬마 숙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다니고 그 작은 입으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손끝에서부터 행복한 웃음으로 터져 나온다.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음악이 아이를 낳고 내 음악이 되었다. 문득 찾아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들었던 수많은 재즈 안에 내 이야기가 있었는지. 


(재즈피플 2017년 11월호, 최종수정 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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