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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영 May 10. 2019

40. 글쓰기(3)

철학과시험

나는 철학과를 졸업했는데 , 철학을 배우며 했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갈수록 난해하고 어렵구만.'
마치 늘 소화불량 상태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 시험이 다가올수록 부담감도 더해졌다.

시험 시간이 되자, 조교가 시험지 뭉치를 들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다들 고등학교처럼 객관식인가 싶어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조교가 칠판에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플라톤 철학에 관해 논하시오'
그리고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시험지는 앞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교가 떠나고 남겨진 우리들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 노력했다. '얼마든지'라는 말은 무엇과 함께 쓰이는지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돈이나 밥이면 반가울텐데, 눈치없이 시험지가 왜 얼마든지 있는걸까싶어 야속하기만 했다.

하여튼 난 머리를 짜내어 커다란 시험지에 플라톤 철학을 주섬주섬 적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의 방대한 철학을 논하기에 나의 그릇은 너무나 작았다. 대충 한바닥을 쓰고나니 더이상 쓸 말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나는 과를 잘못 선택했다며 구시렁거리며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학점이 나오고 친구들과 비교한 후에야 깨달았다. 교수님에 따라서 다르긴 했지만, 많은 분량을 써낸 사람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걸. 그때부터 분량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동기생 대부분이 2학년 때쯤 되자 그리 어렵지 않게 상당한 분량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공대생 몇 명이 철학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공대지만 철학을 알고 싶다며 호기롭게 수업을 신청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손을 번쩍번쩍 들어올려 질문을 쏟아냈다.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고, 눈은 반짝였다.

어김없이 시험이 다가왔다. 시작한지 5분쯤 지나자 그들만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쓸 수 있는 내용은 단 몇줄로 다 쓴 모양이었다. 우리과 학생들은 아직 서론도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공대생들은 연신 불안한 몸짓으로 엉덩이를 들썩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30분쯤 지나자 우리과 학생 몇명이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도 후다닥 따라 붙었다. 함께 강의실을 탈출 할 친구가 생겨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우리과 학생들은 시험지 두장을 더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초라한 시험지를 제출하던 공대생들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그 후, 그들은 두번 다시 철학과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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