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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영 May 11. 2019

42. 슬럼프

김편집자

한동안 몸도 마음도 축 늘어졌다. 똑같은 일상을 살아내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미로 속에 갇힌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미로의 끝을 알면 재미가 떨어질테니 그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다만 탈출구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라도 알고 싶었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온다. 문제는 슬럼프의 이유를 발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다. 만약 운좋게 발견했다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생활에 파동을 주어야 한다. 쥐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한 바다는 구경하는 이에게는 평화로움이겠지만, 바다 자체로는 그리 건강하지 못할테니까. 

내 슬럼프의 원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요즘 풀리지 않는 동화에 있었다. 동화쓰기가 지겹거나, 싫은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전혀 아니라고 대답할테다. 초반에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곤 했다. 그리고 그 원고들은 별 어려움없이 계약을 마쳤다. 문제는 다음 부터였다. 나 스스로 동화쓰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을 들이기 시작하자, 계속 퇴짜를 맞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분명 스토리, 주제의식, 등장인물에 집중해서 이전보다 훨씬 심혈을 기울였는데, 왜 퇴짜를 맞는걸까?

내가 동화를 완성하면 '김편집자'가 읽어봐준다. 김편집자는 오탈자를 잡아내곤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하고, 스토리가 엉성하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제 김편집자에게 나의 고민을 토로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작가 입장에서 열심히 쓴다는 건,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일이겠죠? 작가 자신이 어른이기에 알게 모르게 어른의 입장을 대변한 건 아닌가요? 동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인데, 어른이 하고 싶은 말을 열심히 풀어 놓으면 재미가 없어지죠. 그리고 너무 열심히 하지 마세요. 천천히 쉬엄쉬엄, 힘을 빼고 즐겁게 쓰세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내 고개가 끄덕끄덕 춤을 추었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쓰고,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잘 논다는 말은 진짜 진리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돈을 잘 써볼 기회도, 잘 놀아볼 기회도 없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연습을 해야겠다. 

p.s 김편집자는 우리딸이다. 가끔은 무한 칭찬을, 가끔은 무한 독설을 내게 퍼붓는 나름 유능한 편집자다.
어느 날, 친구에게 말했단다. 
"나에겐 직업이 있어. 근데 비밀이야. 우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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