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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Jul 19. 2023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여행은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다

요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문득 깨달았던 것은 옷을 만드는 과정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것이다.

물론 옷이란 고정된 형체가 아닌 데다 공정의 과정이 훨씬 기술적이고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책보다는 사람의 손이 많이 닿는 물성의 특성상 더 많은 변수가 작용하고 항상 그런 사소한 변수조차 컨트롤했던 일이 나의 주된 업무여서인지 사실 책을 만드는 과정은 그렇게 힘들다고만 생각하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까짓 거 하면서 수월하게 진행했지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의 신입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처음 본사 샘플실에 샘플을 요청했던 날부터 같은 회사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어디나 그렇지만 경력 기본 30년 이상이신 봉제실 언니들은 내가 뭘 알겠어하며 아니꼽게 보셨다. 의상학과를 나와도, 옷을 직접 만들어 봐도 현장은 또 다른 얘기였다. 살벌했지만 묵묵히 버텼다.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것이 회사가 나에게 밥벌이를 가져다주는 의무였기에. 시간이 지나면서야 차츰 나아졌지만.


패션회사는 기본 세, 네 시즌은 같이 물려서 들어가기 때문에 까딱하고 정신 안 차리고 있으면 그냥 사고로 직행이기 때문이다. 원하던 원하지 않든 간에 나도 어어어 하는 사이에 그렇게 급물살을 타듯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간다. 납기가 곧 돈이고, 납기를 못 맞추면 결국 그 시즌의 세일즈 타이밍은 날아간다.


생각보다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체력도 좋아야 한다.

남자들이 할 일을 여자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신입 때는 원단과 부자재 들고 급히 샘플실이며 필요할 때마다 공장이며 여기저기 뛰어가기 일쑤니까 말이다.


뭐 설명 길게 해 봤자 결론은 그냥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는 게 결론이다.

초반 3년간은 정말 그렇게 나의 젊은 날을 녹아내리듯 사생활이라곤 없는 회사생활을 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잘못해서 혼나는 것보다 몰라서 해내지 못하는 것에 스스로가 답답했다.

시달리는 야근에 이미 난 신입시절부터, 아니 대학교 알바시절부터 내 밥벌이는 내가 해야 했기에 쉴새없이 했던지라 이미 그때 육체적으로도 몸의 기가 다 나가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좋은 체력이 아니었기에 매일을 버티려면 한약과 홍삼을 달고 살아야 했다.

웬만하면 힘들어도 그냥 넘기는 나도 그 시절은 정말 너무 힘들 때면 혼자서 화장실 간다는 핑계 삼아 원단 창고에서 남몰래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이렇게 치열하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힘들게 일해야 하는 수직관계 철저한 폐쇄적인 사회의 내 나라의 문화가 정말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당장 떠나고 싶었고, 항상 여행을 꿈꿨다. 돈만 모아지면 어디론가 잠시라도 훌쩍 떠났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피로 회복제를 먹는 것처럼 육체적, 정신적 해방을 위해.


하지만 그 짓거리도 15년간 해본 나의 결론은 여행으로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사를 무작정 그만두냐. 그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회사를 다니던 일을 하지 않든 간에 한순간을 살아도 나답게 사는 것이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할 날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는 힘든 일상의 도피를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요즘의 MZ세대는 특히나 내가 일하기 시작했던 그때보다 좀 더 시작이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하고 도망치듯 일상을 벗어난 화려한 순간의 여행에 심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행은 도피처가 될 수 없다.

심지어는 해외에 살아보아도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나와 비슷한 시절에 떠나 해외에 정착했던 많은 지인들을 보아도 결국 사는 것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사느냐였다.


다행히 운이 좋게 나는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덕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일찍 깨달았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오래 쌓아온 지인과의 단단한 관계가 삶의 벼랑 끝에 갔을 때 가장 힘이 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또다시 반복되는 힘든 일상을, 십 년을 한 회사에 다니면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도피처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면을 성장시키는 또 하나의 지나가는 순간과 소소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인생의 진짜 여행이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어딘가 멀리 떠나지 않아도 충분히 지금의 나를 스스로가 감당하기 시작했다.

힘든 일상을 도망치기보다 마주할 수 있는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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