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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un 15. 2019

약점에 무뎌질 뿐이야

지난 파리일기 


요즘 내게 가장 간절한 건 한글로 된 책이다.

나는 킨들 같은 전자책은 싫고 종이책을 읽고 싶다. 파리로 이사오기 직전 여름엔 책을 집착적으로 읽었다. 책들도 요즘엔 예쁘게 나와서 방에 꽂아두면 보기에도 좋다. 내 방에 아직 읽지 못하고 놓아둔 책을 생각하면 지금에라도 당장 가져오고 싶네. 무겁지만 않다면 좋을텐데. 그래도 전자책은 싫다.


파리에 있는 내 방에 한글로 된 책 중 읽지 않은 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뿐인데 이것도 빌린 거다. 읽고 돌려줘야 하는데 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은 김연수, 은희경 같이 한국 작가들이 쓴 말랑한 소설이라고! 저번달엔 친구가 파리에 놀러오면서 김영하 신간을 사다줬는데 그마저도 다 읽어버렸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제게 책을 좀 보내주세요..)


아무튼 요즘은 또 무지하게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안그래도 저녁잠이 없는 내가 고생이다. 친구를 만나고 새벽이 되어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등을 뒤적거리다 오늘은 그마저도 지겨워서 예전에 쓴 글들을 보기 시작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엔 워드프레스에 썼고, 그보다 더 전, 그러니까 내가 한 스무 살, 스물 하나, 둘 정도 되었을 땐 ‘에버노트’에 끄적거리듯 썼다. 오늘 밤엔 에버노트를 보다가 내가 스물 두살에 쓴 글을 봤다. 무려 6년 전!



그리고 난 깨달았다. 사람 진짜 지독히도 안 변하는구나. 지겹도록 한결 같네! 나는 스물 두살 때도 지금과 아주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는 것으로 판명 났다). 인생이 힘들다느니, 잘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느니, 나는 부족하다느니 하는 말들을 주저리 주저리 잘도 써놨다. 게다가 그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는 보고싶다느니, 이건 나의 문제라느니, 역시 관계는 어렵구나 하는 말들도 잔뜩 버무려져있다. 윽. 내 무덤이 여긴가요.



그 중엔 정확히 2014년 4월 8일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읽고 내 노트에 옮겨놓은 글귀들도 있다. 갑자기 생각하니까 약간 소름돋네. 2014년의 나는 5년 뒤에 내가 그것도 2014년의 내가 있는 곳과는 생판 다른 곳에서 이 노트를 확인할 거란 걸 알았을까! 더 소름돋는 건 2014년의 나와 2019년의 내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거지!



아무튼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불안 때문이었을까. 아줌마처럼 강인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자기가 익히 아는 일은 어떻게든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아줌마처럼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하되 자기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짐작컨대 2014년의 나는 내가 바로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하되 자기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2014년의 내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약점은 여전히 있으며 여전히 치명적이다. 5년 동안 숱한 일들을 통해 생을 분석하는 통찰력이 부족해 여러 번 얻어맞았으며, 그럼에도 5년이란 시간이 부족해서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음을 2014년의 나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2019년의 내가 그것을 약점으로 이해하길 거부하며 그냥 나는 분석에 능하지 않은 사람인 줄로 알고 행복하게 ‘생에 대한 강한 의지’나 다지며 살자고 했다는 것! 어쨌건 해피엔딩.



또 이렇게 쓰여있다.
모든 중요한 일의 결정적인 해결은 꼭 우연이 해둔다. 복잡한 계산과 치밀한 논리를 다 동원하고도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은 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어이없을 만큼 가볍게 해결해버린다.


예상컨대 2014년의 나는 우연의 힘을 믿으며 우연이 2014년의 내가 당면한 ‘그 어렵고도 중요한 일들’을 어이없게 해결해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2019년의 내가 말하건대 나는 아직도 우연의 힘을 믿으며 어쩌면 더 대책없이 그 믿음을 길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분석에 능하지는 않되 삶에 대한 집착적 애정이 강한 사람에겐 이것이 필연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믿음일거다. 복잡한 계산과 치밀한 논리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그저 아, 잘되겠지! 하는 믿음으로 무마해버리려는 습관.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닌데, 사실 조절하면 편하고 괜찮다. 그러므로 패스. 잘 살고 있어. 5년 동안 나쁘지 않았어!



또 이렇게도 쓰여있다.
이모는 이형렬이 자기의 영원하고도 유일한 사랑이라는 지극히 서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게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아, 아무래도 2014년의 나는 서정적인 사랑을 한다고 믿었나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었었나?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저 글귀를 적어놓은 걸 보면 공감은 했나보다. 아니면 그저 멋지다고 생각했거나. 사실 2014년으로부터 5년 밖에 지나지 않아서 딱히 더할 말은 없지만 확실한 건 사랑이 되었든 다른 무언가가 되었든 ‘영원하고 유일한’ 어떤 것에 대한 상상력이 전보다는 줄었다는 점이다. 은희경 작가 참 무서운 게 저 말에 그 이유가 있다- 상처받기 싫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니까 약간 슬프기도 한데, 이제는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것이 기본값이 아니라 냉소적으로 보되 서정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지도 모르겠다. 평소엔 날을 세우고 살다가 가끔은 기꺼이 고통을 느끼도록 스스로를 허락하는 일. 이것도 뭐 나쁘지 않다.



결론적으로 나는 생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강하며 분석은 못 하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가끔씩은 우연이 나서서 해결해주길 바라는 일들이 생기지만 그래도 살만 하며, 서정성을 전보단 약간 잃었지만 그 대책없음만 제외한다면 여전히 서정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5년이 지나고 나는 이십대 초반에서 후반에 접어들었는데 그닥 바뀐 점이 없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 5년 간의 시계열 분석 결과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의 약점에 무뎌질 뿐이라는 것!


글 열심히 써야겠다. 2024년의 나를 위해.


ps. 사진은 피카소 뮤지엄에서 본 것. 피카소 그림들이었는데 아마 추상화 단계 같은 걸 설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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