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세상
도종환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몇일 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오래전 드라마 시리즈를 봤습니다.
<베스트극장>이라는 단막극 시리즈였습니다.
명작들이 많았지만, 그중 잊히지 않는 한편이 있습니다.
이젠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극중 주인공이 부른 노래가 어렸던 가슴에 깊이 박혔었습니다.
노래는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였습니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
나이가 들고 새삼 사무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쓸쓸하다, 라는 단어가 제겐 특히 그렇습니다.
이 단어만큼 눈물나고 적막한 단어가 있을까요.
시인이 먼저였는지 작사가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쓸쓸함이라는 감정이 이리도 비슷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랑만 쓸쓸한 건 아닐테지요.
사는 일 모두가 쓸쓸해서
시인 역시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겠지요.
작은 행성에서 하루에도 해가 지는 걸 수 없이 본다던 어린왕자도 그랬을까요.
왕자가 떠난 후, 장미가 느낀 감정도 쓸쓸함이었을까요.
요즘 저는 오래, 많이 걷습니다.
아마도 천 권의 책도, 석양도, 시 조차도
내 쓸쓸함을 어찌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되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걷다가
이렇게 잠깐 그늘에 앉아 생각합니다.
세상이 쓸쓸하여 여름이 있고,
내리 쬐는 빛으로
잠시라도 어둠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지만, 또 한편 생각합니다.
아무리 쓸쓸한 마음이라도
아이의 웃음과
반려견의 잠든 모습과
푸르게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눈녹듯 사라진다는 것을요.
그런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오늘도 삶을 지속할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