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도쿄
비가 엄청나게 내렸어요. 비 소식은 미리 알고 있었기에 외출했다 일찍 돌아왔죠. 덕분에 번개와 세찬 비가 도쿄를 뒤덮기 바로 직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제 방에서 보는 하늘이 꽤 넓어요. 시원하게 몰아치는 비 덕분에 쉐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낮 시간을 제 방에서 보냅니다.
조용해요. 많이요. 여긴 뭐랄까 마치 고레에다히로가츠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아요. 요 며칠 집으로 돌아오며 영화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답니다.
지난번 방 찾는 이야기를 하다 말았죠. 방은 총 3곳을 둘러보았어요.
첫번째 곳은 도쿄의 외곽에 있는 단독주택의 방 한 칸을 쉐어해주는 곳이었어요. 역에서 집까지 도보 12분이라 했는데 그럼 보통 아무리 빠른 걸음이라도 15분 이상은 걸린다고 봐야 하거든요. 그래도 한적한 동네 분위기가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가정집 방 한 칸을 빌리는 거라 깨끗할 거라는 생각에 먼저 보러 가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방을 보러 간 날이 보통 더운 날이 아니었어요. 땡볕을 15분 걷는 건 지옥 같았죠. 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소박한 상점가가 이어져요. 그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지만 상점가가 끝이 나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너무 한산해서 해가 졌을 때를 상상하니 걷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버렸어요. 그 집으로 향하는 동안 발걸음 돌려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방을 보지 않고 돌아갈 수도 없었답니다.
그 집에 도착했을 때 제 모습은 얼굴은 양껏 빨개지고 온몸에는 땀이 송송 맺힌 상태였어요. 안내를 받고 집으로 들어갔더니 보리차를 한 잔 내어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하던지. 최근 몇 년간 마신 물 중 가장 절실하고 가장 맛있었던 물이었습니다. 집은 2층 단독주택으로 2층 방 하나를 쉐어했는데 워킹홀리데이로 지내던 학생이 귀국하게 되어 방을 내놓으셨데요. 방은 넉넉한 사이즈로 침대, 책상. 작은 냉장고, 진자 레인지, 행거 그리고 수납 스페이스까지 꽤 괜찮았어요.
하지만 급행으로 신주쿠까지 20분 정도라지만, 제가 이곳에 올 때 탔던 가장 보편적인 전철을 보면 같은 노선의 전철이지만 환승이 많았어요. 두서너 번 환승해야 하는데 (환승 시 플랫폼은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주 힘들었어요. 이게 어떤 거냐면 종점인 역이 나의 종착지보다 더 앞에 있어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하면 플랫폼에 서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5~10분 정도는 소요된다는 말이랍니다. 특히, 케이오선은 지하로 달리는 게 아니라 더운 여름의 햇살을 그대로 받아야 하고 (물론 그건 겨울에는 춥다는 말이겠죠),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 전철의 끝에 죽음의 도보 15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일 년의 반은 춥습니다. 또 반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고 덥습니다. 마음 내킬 때 살랑거리며 걷는 산책이라면 1시간도 족히 걸을 수 있지만, 출퇴근 시간 왕복 30분을 걷는다는 건 구두는 신을 수 없다는 것이고, 땀을 계속 흘러야 한다는 말이고, 장화와 우비가 없이는 안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일단 방은 마음에 들지만 오는 길이 힘들다며 그날 중으로 답변을 드리기로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테스트처럼 다시 오던 길을 걸어 되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오던 길보다 더 덥게 느껴졌어요. 저는 택시가 없나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며 역으로 향했습니다. 향하던 도중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길래 일단 올라탔습니다. 그 뜨거운 태양 아래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어요. 올라타 빈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려 하니 안내 방송이 나왔어요. 다음 역이 전철역이라는. 저는 결국 땀도 식히기 전에 앉자마자 바로 버스에서 내려야만 했죠. 돌아오는 전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날 저녁, 친절히 집을 보여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아쉽게도 결정을 못 드려 죄송하다는 톡을 보내는 걸로 첫 번째 집 견학을 마무리했습니다.
두 번째 집은 본격적인 쉐어하우스였어요. 역에서는 도보 10분 정도지만 중심가에 있어 그 정도 걷는 건 감안할 수 있다 싶었어요. 여긴 4층 건물로 1층에서 3층은 공동욕실과 화장실이 있고, 4층은 원룸 형태로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방이 세 개 있어요. 저는 4층 원룸이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4층 원룸은 공실이 없었어요. 이번 달 말에 계약이 끝나는 방이 하나 있다 했지만 그것도 지금 방을 계약한 사람이 연장을 하게 되면 계약은 불가능하다 했죠. 1층과 3층 빈 방 3곳을 보았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고시원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구조는 그에 가깝지 않을까 해요. 거기에 4층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원룸의 느낌을 보기 위해 4층까지 걸어 올라갔는데 급경사의 계단이 이 집은 아니야라고 제에게 끝없이 속삭이는 것 같지 뭐예요. 아마 원룸이 비어있었더라도 고민되었을 것 같아요.
도쿄에 장기 여행처럼 머물 거라면 에이비엔비나 호텔도 나쁘지 않지만, 저의 경우는 주소 등록이 꼭 필요하거든요. 주민 등록을 할 수 있는 거주지를 찾는다면 지금의 경우는 쉐어하우스나 룸쉐어밖에 없답니다. 일본에서 집 구하기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일이죠. 집을 구할 땐 심사가 필요한데 일단 안정적은 수입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증명서가 또 필요해요. 그래야 심사를 신청할 수 있거든요. 직장이 있어야 집을 구할 수 있고, 직장을 구하려면 일단 거주지가 있어야 하죠.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뭐 그런 비슷한) 그리고 거주지 등록, 즉 실거주하는 주소가 있어야 핸드폰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취업활동도 가능해져요. 이것이 여행이 아닌 일상의 첫걸음이랍니다.
참, 왜 일본 쉐어하우스는 찾지 않았는지 궁금해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왜 찾아보지 않았겠어요. 다 찾아보았지요. 보통 일본 쉐어하우스는 계약기간이 1년 혹은 2년으로 정해진 곳이 많았어요. 개중엔 6개월도 있었지만 뭐든 제한이 있는 건 좀 싫었어요. 그리고 계약 수수료 등 초기 비용이 훨씬 많이 발생했어요. 그래도 들어가고픈 곳이 몇 곳 있긴 했는데, 세상에 나이 제한이 있지 뭐예요. 생각도 못 한 거죠. (도쿄는 아니었지만, 역으로 중년 싱글을 위한 룸쉐어도 있긴 했어요. 거길 갔어야 했는지도 모르죠) 그런 이유들로 일본 쉐어하우스에서의 삶은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길어졌군요. 아무튼, 되도록이면 빨리 집을 구해야 하는 저는 만약 끝내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도 염두에 두기로 했습니다. 역에서 쉐어하우스까지 주택가로 이어진 한적한 길을 마음에 담으면서 말이죠.
세번째는 룸메이트를 구하는 곳이었어요. 이곳 역시 도쿄의 외곽 쪽이라 중심에서 전철로 4,50분은 걸리는 곳이에요. 그래도 지상으로 달리는 구간이 조금 있긴 했지만 거의 지하를 달리고 종점이 중간에 있는 경우는 아니라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도쿄의 전철은 크게 JR과 도쿄 메트로 그리고 사철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 JR이에요. 하지만 저는 도쿄 메트로를 가장 좋아해요. 배차 간격이 짧고 지하철이지만 아주 깊지 않은 것도 좋고 웬만한 중심지는 다 갈 수 있기 때문이죠. 거기에 24시간 패스까지 있어 아주 요긴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사철. 사철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느낌적으로 도쿄 메트로 보다 더 지하에 있거나 환승 동선이 나쁘거나 배차 시간이 긴 것 같아요. 그래서 도쿄에 살게 된다면 되도록이면 지하철역을 선호하죠. 하지만 지금의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어쨌든 자력으로 집을 구하기 전까진 어딘가에서 신세를 져야 하니까요. 그럴 땐 욕구가 너무 크면 힘들어지는 거 아시죠? 내 안에 있는 만족도를 한없이 낮춰야 해요. 물론 저는 그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방을 보러 가는 길은 왠지 발걸음이 가벼웠어요. 전철을 타는 시간은 길지만 의외로 역과 집과의 거리는 가까웠죠. 자아,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전철 30분 + 환승시간 10분+ 도보 15분과 전철 40분 + 도보 3분. 저는 역에서 내리며 이 집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소박하고 자그마한 방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어요. 남향에 베란다가 넓은 데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 확 트인 느낌이었죠. 룸쉐어라 방 두 칸짜리 집을 한 칸씩 나눠쓰는 건데,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 그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첫 룸메이트 같아 보여요) 저는 바로 계약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곳을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청결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건이 괜찮았어요. 보통의 쉐어하우스는 퇴실 2달 전에 통보해야 하던데 이곳은 1달 전에 통보하면 되고, 룸이 많은 쉐어하우스는 아무래도 화장실과 욕실 사용이 불편할 텐데 룸쉐어는 그 문제도 부담을 덜어주었어요. 그리고 전철을 타고 오가는 시간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가성비도 나쁘지 않았고, 당장 들어올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어요.
계약을 완료하고 받은 공동생활 안내문에는 공용 시설 (화장실/욕실/거실)의 청소는 주인이 맡아하겠다는 것과 그릇과 타월 등은 개인 용품을 사용해달라는 것 그 외 세제 휴지 등의 제품은 관리비에 포함된다는 쓰여있었고, 혹시나 결혼을 하게 되면 먼저 퇴실을 요구할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린다는 문구가 들어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참 좋은 말이에요. 말의 취지보다 그 말 자체가 제 머릿속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저는 새로운 방을 구했고, 무사히 주민 등록을 마쳤고, 핸드폰도 개통했습니다.
저만이, 혹은 저와 비슷한 사이즈의 사람만이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싱글 침대에 누워 남은 호텔 예약을 모조리 취소하며 행복했습니다. 타월을 말릴 곳이 없어 커튼 옆에 걸어두긴 했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도쿄의 일상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마냥 좋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인 일찾기에 들어가겠지만, 그전까지 내 안을 도쿄로 채우는 소소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2년의 공백 기간 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 건물과 또 눈 깜짝할 사이 새로 생긴 건물, 아날로그틱한 게 좋다 했는데 어느새 디지털화가 되어버린 아끼던 여러 곳들. 급격히 오른 물가 그리고 쌀값이 올랐다는 뉴스를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는데 좋아하는 식당의 밥맛이 바뀐 걸 알고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도쿄에 온 지 10일이 조금 넘었나요? 매일 실감합니다. 이상의 도쿄와 현실의 도쿄를. 여행과 일상의 확연한 차이를요.
그건 그렇고, 요 며칠은 일상 쇼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단 제 안에 쇼핑의 룰을 정했어요. 일시적인 사용 목적으로 아주 저렴한 걸 구매하거나 오래 쓸 목적으로 꼭 마음에 드는 걸 구매하는 걸로요. 오늘은 며칠 동안이나 찾아 헤매다 발견한 자그마한 행거를 소개합니다. (이젠 나 홀로 조립 정도는 껌이죠)
여행 때 사둔 무지의 이 자그마한 가위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십자드라이버 역할까지 해주었답니다. 요게 얼마 정도의 사이즈냐면요 종이컵에 담으면 동그란 손잡이 부분만 살짝 나오는 정도예요. 여행 가방에 늘 챙겨두었다 쇼핑 후 텍을 자르는 용도로 즐겨 사용했는데 일상에서도 아주 유용하네요. 잘 챙겨두어야겠어요.
짜안, 새로 데려온 행거에요. 어떠세요? 길이는 내 키 정도(그건 나의 롱 원피스가 걸린다는 얘기에요), 너비 두 뼘 정도에 폭도 두 뼘 정도랍니다. 작은방에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기능을 살리는데 이만한 아이가 없죠.
커튼 옆에 걸어둔 타월도 옮겨왔고요 니토리에서 산 세탁용 옷걸이에 셔츠도 꺼내 걸어보아요. 마음에 쏙 듭니다.
옆에는 세리아라는 100엔 숍에서 데려온 세탁 바구니와 자그마한 목욕 바구니가 있어요. 그 옆으로는 건 무지의 청소 용품과 휴지통이고요. 이후의 이사 와 방 사이즈를 고려해 다들 미니미니한 걸로 골랐답니다. 재잘재잘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네요. 시간이 하염없이 빠릅니다.
저는 앞으로 매일은 아니겠지만 한 번씩 마음먹고 자리에 앉아 긴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인생을 리셋하는 마음으로 도쿄로 날아왔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이전의 저를 묻어두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대신 가끔 제가 옛이야기를 끄집어 내면 그때는 이전의 저를 잠시 떠올려도 좋아요. 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게 제가 아닐 때도 있을 거예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거짓일 수도 있고요. 가끔 상상을 더할지도 모르겠어요. 몽롱한 경계를 함께 즐겨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갈게요. 곁에 있어 주세요. (이건 비밀인데 사실 조금 외롭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