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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Feb 14. 2021

회사생활과 김밥천국

사회초년생의 사적인 혼밥일기

#01 : 김밥천국




 정겨운 색깔이 있다.


 버스를 타면 창 밖으로 눈길이 간다. 그럴 때 나는 주로 간판을 본다. 간판은 사람이랑 닮은 구석이 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카페의 간판을 보면 한껏 응원하고 싶어진다. 카페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잘 버텨주길 바란다고. 마치 어린아이가 별 탈 없이 커 주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반면 낡은 간판을 볼 때는 애틋한 감정이 솟아난다. 언젠가 금호동의 언덕길을 오르면서 오래된 방앗간을 본 적이 있다. 색 바랜 노란색 간판은 지나온 세월을 암시하듯 낡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 장면이 영화였다면 방앗간 주인이 처음 그 방앗간을 여는 과거의 순간으로 오버랩될 것이다. 방앗간 주인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뿌듯함과 설렘이 교차하는 얼굴. 그 장면을 가만히 떠올리니 애틋하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서 바깥을 천천히 바라본다. 그러다 어느 한 간판에 시선이 멈춘다. 채도 낮은 주황색. 군데군데 빛 바랜 흔적들. 네 글자의 가게 이름.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한 무더기의 김밥들. 익숙한 주황색이 괜히 정겹다. 그렇다. 김밥천국이 보였다.


 나는 김밥천국을 좋아한다. 김밥천국에는 메뉴가 많다. 그 날의 기호에 맞는 맞춤형 메뉴를 고를 수 있어서 좋다.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날에는 매콤하게 볶아낸 제육덮밥이 딱이다. 끼니를 때우고 싶은데 배 부르게 먹기는 부담스럽다면 야채김밥 한 줄과 따뜻한 된장국 조합을 권한다. 아르바이트나 직장에서의 점심 시간이라면 두툼한 경양식 돈까스로 에너지를 두둑히 채우자.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함께 먹는다면 나눠 먹기 좋은 조합을 고르는 것도 꽤나 재밌는 구석이 있다. 라볶이에 참치김밥. 된장찌개와 제육덮밥. 내가 보기엔 버거킹의 와퍼 세트나 서브웨이의 샌드위치 쿠키 콤보보다 훨씬 완벽한 조합을 자랑한다. 사람 수에 맞는 완벽한 조합을 퍼즐 맞추듯 완성한다면 은근한 희열을 느낀다. 우리 서로 통했구나. 


 김밥천국의 주황색 간판이 정겨운 것처럼 김밥천국 안에서의 경험도 마찬가지로 정겹다. 김밥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고 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아무 테이블이나 찾아서 앉는다. 그 다음 각자 휴지를 깔고 테이블에 장착된 수저통을 드르륵 열어서 수저를 꺼내놓는다. 그리고 물은 셀프. 이것은 전국 김밥천국의 공통 규칙이므로 누군가는 물을 떠오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메뉴가 적힌 메모지에는 빨간색 모나미 펜이 고무줄로 매여져서 달려있다. 한 명이 메뉴를 말할 때마다 서기 담당은 메모지에 브이자를 찍 긋는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메뉴 조합의 시간. 얼추 구성이 정해졌다 싶으면 목소리 큰 사람이 손을 들고 외친다. ‘사장님 여기 주문이요!’ 경쾌하고 유쾌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6시 정각에 퇴근하던 작년의 어느 가을날. 그 때의 나는 몸보다 마음이 훨씬 지쳐있었다. 첫 사회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추는 일은 자신있었다. 하지만 어렵다는 말과 힘들다는 말은 동의어가 아닌 것도 알고 있었다. 회사생활은 어렵지 않았지만 마음은 점점 닳아갔다. 남을 위해 내 감정을 소비하는 일이 지치고 힘들었다.


 퇴근하는 시간에 하늘이 어둑해지는 걸 보고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 그 날은 사람을 대하는 일에 지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집에 곧장 가면 가족들이 있어서 혼자를 누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당장 배가 고프니까 혼자 밥을 먹으면서 숨고르기를 하면 어떨까, 해서 집 근처 동네를 무작정 서성이기 시작했다. 순대국 집이 보였다. 순대국은 조금 부담스러운데. 초밥집이 보였지만 초밥은 우울한 날 말고 기분 좋은 날에 먹는 것이 좋겠다. 떡볶이는 안 땡겨. 목적 없는 걸음을 계속했다. 그러던 와중에 아주 익숙한 주황색 간판이 눈에 딱 들어왔다. 그래,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밥 먹고 싶을 땐 김밥천국이 딱이지. 이럴 때 만나게 돼서 무지 반갑네.


 쫄면을 주문했다. 새콤하고 매콤한 쫄면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날따라 아삭한 야채와 쫄깃한 면발을 오물오물 천천히 씹고 싶었다. 주문한 쫄면이 금새 나왔다. 채썬 적양배추와 오이, 상추, 당근이 그릇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위에 새빨간 양념과 함께 계란 반 쪽이 살포시 얹혀 있었다. 계란은 잠시 앞접시로 옮겨 둔다. 비빌 때 계란이 깨지면 곤란하니까. 이제 쫄면을 사정없이 비빈다. 흰색 면이 점차 주황빛으로 물드는 순간에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잘 비벼진 쫄면을 젓가락으로 들어올려 한 입 후루룩 먹는다. 오물오물. 쫄면은 오래 씹어야 한다. 질기니까. 



 오물오물 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업무 기한을 스스로 맞추지 못했던 일. 스스로 기획한 아이디어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자책을 반복했던 일. 동기들이 만들어 놓은 멋진 기획안을 내 것과 비교하면서 나 자신을 깎아내린 일. 쫄면이 질겼다. 회사 생활도 그만큼 질기지. 앞으로 징하게도 찾아올 이런 감정들. 비교하고, 자책하다가도 뿌듯함을 느끼고, 언제는 한없이 지루하기도 하는, 그런 나날들. 앞으로 계속 힘들고 지칠 것을 걱정해야 할까. 아니면 그렇게 다가오는 감정에 무뎌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무서워해야 할까. 앞접시에 옮겨둔 계란이 보였다. 한 입에 털어넣어 먹었다. 아무 맛도 안 느껴졌다. 아니, 담백한 맛은 있었다. 나는 계란처럼 담백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어이없는 상상을 하면서도 지금 혼자라는 사실이 문득 좋았다. 혼자 먹는 쫄면이 참 맛있네. 그릇을 싹 비웠다.


 삶의 속도감이 너무 빠르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바쁜 일들로 시간을 보내느라 하루가 금새 끝나버린 것을 체감할 때. 집중해야 할 일들이 한껏 밀려서 주위를 바라보지 못할 때. 작은 풍경, 작은 목소리에 주목하지 못하고 오직 커다랗고 묵직한 일들만 생각할 때.


 혼자 밥을 먹는 순간에는 멈춤이 있다. 거기에는 억지스러운 대화가 없다. 투두리스트나 데드라인도 없다. 식당에 앉아 메뉴를 고민하고 맛있게 먹는 과정만이 존재한다. 그때 스마트폰은 잠시 꺼 두는 것을 추천한다. 오로지 먹는 일에 집중해보자. 장소는 김밥천국이 좋겠다. 정겨움을 품은 공간에서 익숙한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되돌아보거나 과거를 추억하는 일. 당신에게 혼밥을 살며시 권해본다. 오직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함의 순간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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