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주의 문장수집
의미를 따지는 순간 삶은 피곤해진다. 일의 의미, 취미생활의 의미, 워라밸의 의미, 글쓰기의 의미, 오늘 본 영화에 숨은 의미 같은 것들. 그런데도 우리는 열심히 의미를 찾는다. 피곤함보다 무서운 게 바로 공허함을 느끼는 거니까. 내 일상이 아무 의미 없다고 느끼는 순간 공허함이 다가온다. 공허함은 끝이 없다. 깊은 바다처럼 아무리 끝을 쫓아도 어디가 끝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요즘 들어 감정의 높고 낮음의 빈도가 들쑥날쑥하다. 대체로 퇴근하고 혼자 있을 때 쓸쓸함을 느끼다가도 회사에 가서 친한 동료들과 점심을 먹거나 주말에 친구들을 만난다거나 하면 기분이 쉽게 풀린다. 몇 달 전과 주변 환경은 차이가 없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왜 이렇게 다르지, 천천히 생각해보니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원인은 일종의 부담감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자주 상상하곤 한다. 30대 초반의 나의 모습부터 40대, 그리고 아주 가끔 내 아빠와 비슷한 나이에 들어선 내 모습까지. 20대 중반 무렵에는 지금의 나를 한껏 상상하고 있었다. 좋은 직장은 아니더라도 가고 싶은 분야에서 어떤 과업이 주어지든 간에 열심히 뛰어드는 열정 넘치는 신입사원을 머릿속에 그렸던 것 같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 되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나은 상황이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만큼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좋은 동료들을 만났으니까.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다. 김밥천국에서 아무 기대 없이 라면을 주문했는데 왠걸, 오동통한 낙지 한 마리가 들어간 해물 낙지 짬뽕이 나와버린 것과 닮은 상황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몇 년 전에 꿈꾸던 모습보다 더 많은 행운을 겪었다.
부담감은 이 지점에서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었던 것 같다. 기대보다 더한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선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만큼 몸이 따라가주지도 않고. 내가 잘 하고 있는 것 같다가도 다른 동료들을 보면 대단히 어려운 일을 쉽게쉽게 해 내는 것 같고. 다른 이들에 비해 스스로 성장하는 속도를 재 보면 너무 더딘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고.
내가 미래를 자주 상상했던 이유는 내 삶이 의미로 가득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20대에는 이런 삶, 30대에는 또 다른 모습의 삶, 노년에는 또 다른 방식의 의미가 있는 삶. 그렇게 내 미래를 촘촘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내가 상상한 모습과 실제의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 그걸 대단히 싫어했다. 지금의 내가 부담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정해놓은 '신입사원 시기의 이상적인 모습'에 잘 따라가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좋은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의미를 열심히 채우려고 하지 않는 내 모습에 불만이 생겼다.
인생의 의미는 거대한 사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은 사건들이 퇴적되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나간다. 오늘 내가 한 생각과 말, 들은 말들로 내 인생이 꾸려진다.
- 태도의 말들, 엄지혜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는 지금에서 엄지혜 작가의 문장을 만났다. 인생의 의미는 거대한 사건이 아닌 작은 일상들로 꾸려진다고. 이 문장을 천천히 새겨읽고 나니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인생의 의미는 그 시기를 겪기 이전까지는 내가 맘대로 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의미는 커다란 일이 아닌 오히려 소소한 순간들이 퇴적되어 차근차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무언가에 합격하고, 무엇 때문에 크게 좌절하는 일들이 아니라, 마치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면서 하루를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 의미는 비롯되는 것이라고. 삶의 의미를 무겁지 않고 가볍게 대할 때 지금 이 순간들을 기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배웠다.
의미를 따지는 순간 삶은 공허해진다고 서두에서 말했다. 큰 의미를 좇는 대신 지금 이 순간들을 즐겁게 보내는 것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일상이 농담을 닮기를 바란다. 한없이 진지한 분위기를 가벼운 농담 한 마디로 살살 녹이듯이, 살아가면서 피식- 하며 웃고 넘길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일 대신, 그저 주위를 둘러보는 일이다. 길에 놓인 조약돌을 무시하지 않고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일상을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다짐'이라고 하니 또 무거운 느낌이 든다. 이 문장도 농담처럼 스쳐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