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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Apr 22. 2024

삶의 질서를 의심해 본 적이 있나요

Review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가 좋아했던 순간들은 예상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제주도의 작은 동네에서 느꼈던 밤의 고요함, 별 생각 없기 고개를 들었을 때 발견한 별자리들, 집 근처 서점에서 별 생각 없이 구매한 책이 인생 책이 되어버린 경험 같은 것들. 최근의 영국 여행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잔뜩 느끼고 왔다. 열심히 짠 스케쥴대로 보낸 하루보다, 별 생각 없이 숙소 근처 카페에서 서너 시간을 보낸 날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직관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우연히 나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감정들을 소중히 다루려 노력한다.


 직관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디제이로서 음악을 들을 때가 그렇다. 디깅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음악에 이름을 붙이게 된다. 이 음악은 어떤 사운드를 기반으로 어떤 레이블과 유사한 어떤 장르의 음악인지 등등. 그렇게 음악을 구매하고 난 다음 또 이름을 붙인 폴더에 옮기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어느 타이밍에 그 음악을 틀어야 할 지 생각하면서. 나만의 분류이자 범주인 셈이다.


 이런 분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즈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작가는 책에서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세상의 범주와 질서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을 깨닫는 과정과 관련된 개인의 긴 서사를 담았다. 단어가 해체될 때 우리는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소개할 때 직업이나 나이를 물으면서 안정감을 찾나 보다(때로는 MBTI). <사상검증구역 : 더 커뮤니티>에서 출연자들의 성향이 공개되기 전과 후의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우리는 우리가 이름 붙인 것들을 통해 질서를 추구한다. 직관도 마찬가지로 질서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혐오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 대상과 만났을 때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부정적인 것처럼.



 다시 내가 소중히 여겼던 과거의 기억들로 돌아가본다. 어쩌면 그 순간들은 직관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나에게 즐거운 경험을 남겨주었다. 책에서 작가는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어는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어쩌면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며.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질서로 가득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힘에 부치다면, 때로는 스스로 그 질서를 부수자. 이름 없이 우연히 다가오는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여보자. 이름을 지어준다면 신중히 고민하는 과정을 겪자.


 디깅을 하면서 재밌었던 순간이 있다. 웜업 타임에 틀기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폴더에 넣어두었는데, 런던에서 어떤 디제이가 그 음악을 피크타임에 틀었고, 그 순간 사람들이 엄청 환호해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조금은 바뀔지도 모르겠다.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라는 책의 말처럼 분류의 강박을 버리고 우연을 즐기는 일상을 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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