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아름다웠던 시절/괴로웠던 나날들을 회상하는 추억의 기록입니다.
[에필로그]-<아무튼, 영화>
♠영화는 아름다웠던 시절/괴로웠던 나날들을 회상하는 추억의 기록입니다.
【Epilogue】
♠영화는 아름다웠던 시절/괴로웠던 나날들을 회상하는 추억의 기록입니다.
몇 년 전 도서관 모임에서 만나 친교를 나누고 있는 한 작가님과 티타임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오릅니다. 소통 중에 언론과 시사적인 이야기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그분의 강건(剛健)한 역사관과 명징한 시대 의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도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특히 삶 속에서 인간이 정신적/정서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 리액션(reaction)이 너무 좋아서 저와의 대화가 즐겁다 하셨지만, 사실은 그가 워낙 달변(達辯)인데다가 다양한 분야의 폭넓은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말솜씨의 소유자여서 2시간여의 대화시간이 순삭(瞬削)된 듯 빨리도 흘러갔습니다.
담소(談笑)를 나누던 중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화제(話題)는 남들은 다 쉽게 하고 잘 즐기는데 나만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자전거를 타지 못하며 시도해보기조차 두려워하는 분야라는 것을 고백하듯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 자전거 타기를 배우다 상당히 큰 사건/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고, 이후로 일종의 트라우마(Trauma)가 생겨서 재도전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연도 덧붙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평소 생활 속에서 자전거 타기를 즐길 수도 없었고, 요즘 자전거 동호회에서 즐겁게 활동하며 틈틈이 라이딩을 즐기고 있는 남편의 자전거 취미활동에 동참할 수도 없어 아쉽다고 하며, 자전거 취미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느낀다고도 말하였습니다.
저의 아쉬운 사연에 이어 그 작가분이 자신의 개인적인 핸디캡(handicap)이라고 내어놓은 에피소드(episode)는 뜻밖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폐소공포증(閉所恐怖症)’이 있다는 의외(意外)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극장에 들어가서 문이 닫히고 전등이 꺼진 후 스크린에 영화 상영이 시작될 때, 조명이 꺼진 채 암흑천지(暗黑天地)가 되는 그 순간이 오면 실체를 알 수 없는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출구를 찾기 어려운 꽉 막힌 공간에 갇혀버린 듯한 두려움에 호흡에까지 문제가 생기는 느낌이어서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모순(矛盾)되게도 영화마니아(movie mania)이고, 주로 집에서 영화를 관람한다고 하였습니다. 과거 비디오 대여점이 성행하던 시절 비디오테이프에 의존하던 때에 비해,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사용자가 원할 때 각종 영상을 보여주는 주문형 비디오 형태인 VOD(video on demand)서비스가 있는 덕분에 그것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OTT(Over-the-top) 시스템을 통해 집에서도 마음껏 영화를 볼 수 있으니 정말 좋다고 이어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의 혁명에서 파생된 다양한 혜택들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누릴 수 있게 된 이 첨단의 시대가 자신에게는 크나큰 축복(祝福)이 아닐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또 그는 영화를 좋아하는 탓에 영화 리뷰(review)나 영화 평론(評論)을 찾아보며 최신 개봉 영화를 발 빠르게 접하고 있다는 것과, 영화 시사회나 배우들의 무대인사 등에도 가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데 극장에는 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나니, 누구나가 자신만의 어려움과 취약한 부분을 하나씩은 다 갖고 살아가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스쳤습니다. 자기자신도 어쩔 수 없는 어떤 특성이 내재되어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실질적으로 가능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후로도 그 작가님과의 인연이 이어지게 된 것도, 제가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며 책과 영화 리뷰(review)를 게시물로 발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기는데 극장에는 갈 수 없다는 그는 제가 책과 영화, 그리고 전시 콘텐츠(contents)로 저의 브런치 계정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구독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 글을 업데이트(update)할 때마다 잘 챙겨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소소한 글쓰기 취미로 독백을 하듯 편하게 쓰는 글을 브런치에 올리면서도,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고 구독과 라이크잇(Like-It)을 눌러주는 것이 처음에는 다소 부끄럽기도 하면서 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분인지 모르는 독자분들이 달아주신 댓글에 제가 대댓글을 이어 달며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소통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또 다른 어느 날 그 작가분을 다시 만났을 때 제 영화 리뷰(review)를 읽은 느낌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살짝 언급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를 좋아하는 탓에 영화평을 찾아 읽곤 하는데, 영화 평론(評論) 성격의 글들은 다소 어렵게 다가오기도 하였고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저의 영화 리뷰(review)가 일단은 읽기 쉽고 가독성이 좋아서 술술 잘 읽히는 글이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비전문가인 중년의 아줌마가 그저 영화를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 하나만으로 특별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써 내려간 영화 취미생활 후기 수준의 글이라 친근하게 다가왔을 터였습니다. 영화관람과 영화수다에 대한 기록과 단상(斷想)을 남기는 정도의 무겁지 않은 에세이라서 부담 없이 편안하게 읽힌다는 뜻으로도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글의 내용을 편안하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튼, 긍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하며 제가 받아들이기 편한 방식으로 좋게 해석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비루(鄙陋)한 글솜씨를 바탕으로 유연하게 써대는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계속해도 좋겠다는 내 멋대로의 자기 확신도 가져보았습니다. 영화관람 후 느낀 바를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편안하게 쓴 영화감상문 성격의 에세이(essay)를 부끄럽고 소심하게 커뮤니티(community) 계정에서 발간해 왔던 저는 이렇게 스치듯 접한 누군가의 호의 어린 격려의 말에 힘입어 나름의 글쓰기 작업을 지속해도 좋을 이유와 심리적인 자유로움을 얻게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감수성이 좀 예민한 유전자를 디폴트(default)값으로 장착하고 태어난 듯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책과 영화/음악을 자연스럽게 즐겼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날 기억 속의 내 아버지는 커다란 전축을 애지중지(愛之重之)하셨고, 꽤 많은 LP(long-playing record)판을 소장하고 계셨습니다. 지금은 80대 어르신으로 황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는 음악을 즐기고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등 젊고 활기 넘치는 도시 멋쟁이 김** 씨의 모습으로 추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다양한 취미생활을 등 너머에서 접할 수 있었던 환경 덕분에, 음악을 통해 영화로 연결되는 제 관심의 씨앗이 일찌감치 싹틀 수 있었던 듯합니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전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니 아버지의 수많은 LP(long-playing record)판 중에는 영화 <러브스토리(love story)>/<빠삐용(Papillon)>/<죠스(Jaws)>/<고래사냥> 등을 비롯하여 국내외를 망라(網羅)한 영화음악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버지가 즐기시던 성인들의 대중적인 음반이 아니었고, 그 시절 어렸던 제 눈높이에 딱 맞는 것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아버지가 우리 자매들을 위해 구입하신 <태권동자 마루치아라치> LP판이었는데, 아빠가 그 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플레이해주시면 우리 자매들은 전축 앞에 모여앉아 집중하고 빠져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음악만 수록된 것이 아니었고, 각 배역에 안성맞춤인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중간중간 음악과 효과음까지 절묘하게 삽입되어 재미있게 풀어가는 일종의 음성(音聲) 영화였던 것입니다. 그 시절 저는 그것을 들을 때 단순히 음성과 음악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치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을 통해 각 장면을 눈으로 보는 듯한 느낌으로 이미지화하였기에, 실제로 영화를 관람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안계실 때에는 호기심이 많았던 제가 나서서 전축 상단의 투명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젖힌 후,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도넛 같은 레코드판을 전축 상판에 올려놓았습니다. 레코드판을 회전시키는 동그란 받침대인 턴테이블(turntable) 위 정중앙 돌출막대에 음반을 잘 맞추어 끼워 꽂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LP판을 플레이하기 위해서 평소 어깨너머로 본 대로 아버지가 하셨던 것과 똑같이 하였지요. 전축의 바늘 끝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 LP판 가장자리 끝에 살짝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준비가 다 되었을 때 동생과 함께 전축 앞에 앉거나 누워서 다양한 음악과 음성 영화를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의 힘 조절을 잘못해 전축의 플레이 바늘로 LP판을 긁어먹는 사건/사고를 저지른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반복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전축을 다루는 것에 좀 더 익숙해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레코드판 한 면을 다 들었으면 능숙하게 판을 뒤집어 꽂아가며 다음 챕터를 이어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들었던지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음악이 나오는지는 물론 음성 영화의 대사까지 거의 다 외울 지경이었습니다.
무심한 세월은 유유히 흘러갔고 제가 차차 성장해 가면서 극장에 갈 기회도 생겼습니다. 더이상 부모님을 대동하지 않고도 극장에 갈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는 고모를 따라 극장에 가 영화 <탑건 : Top Gun>을 관람하고 할리우드 배우 ‘탐 크루즈(Tom Cruise)’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당시 청소년기 초입에 진입하던 시기였던 저는 영화 속에서 그토록 멋졌던 훈남 배우에게 홀딱 반해서 그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책받침과 브로마이드(bromide)를 모으면서 일종의 연예인 덕질을 처음으로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어린 사촌 동생을 극장에 데려가 무적의 파이터 <우뢰매>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친구와 <시네마 천국 : Cinema Paradiso>을 관람하고 큰 감동을 받아 ‘내 인생 영화’ 최상단의 우선순위에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포레스트 검프 : Forrest Gump>/<은행나무 침대>/<미술관 옆 동물원>을 관람하며 설레이는 데이트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저의 성장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함께 한 영화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여러 극장을 들락거리며 수많은 영화들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의 생애주기에서 영화는 제 삶의 곳곳에서 함께해온 편안하고 절친한 친구와도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합니다. 어린 시절로부터 50대 중년의 연령대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간 살아온 개인적인 인생 여정(旅程)을 생각해 보면, 제 삶의 어느 시기/어떤 지점에서든 함께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음악을 들으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와 비슷한 원리인 조건반사와도 같이 자동으로 그 영화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관람했던 그날의 그 순간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됩니다. 혼자였는지/아니면 누군가와 함께였는지/그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그 영화를 보던 때의 내 마음은 즐거웠는지/행복했는지/기뻤는지/슬펐는지/괴로웠는지/불행했는지, 영화를 통해 그 당시 그 순간의 나를 그대로 소환하여 추억하게 됩니다. 그 과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영화는 아름다웠던 시절/괴로웠던 나날들을 회상하는 추억의 기록입니다.
돌이켜보면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고, 자칫 가라앉기 쉬운 내 예민한 정서를 위로하며 일으켜 세워주듯 다정하고 희망적인 메시지(message)가 담긴 영화를 저는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간 살아온 과정에서 제 삶의 곳곳에 고마운 영화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은 개별 영화를 논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영화 자체의 의미에 대한 포괄적인 이야기를 더 하고 싶습니다. 저를 스쳐 지나간 모든 영화는 그 나름의 유의미한 존재감으로 기억 속 어딘가에 크고 작은 편린(片鱗)이 되어 저의 의식/무의식 속에 콕콕 박혀 있는 까닭입니다.
영화 속에는 현실보다 더 리얼(real)한 스토리가 있고, 현실 속에는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엄격하게 나누는 것 자체가 모순(矛盾)이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와 삶은 맞닿아 있다고 느낍니다. 영화는 제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그 순간에도 함께였고,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추억 속에서도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 삶에서 가장 괴로웠던 나날들에서는 힘겨워하며 휘청거리는 저를 바로 세워주며 다정한 위로를 건네주었습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회상하게 해주고, 추억에 대한 기록이 되는 게 바로 영화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문득 영국의 배우/코미디언/영화 감독이자 음악가로, 무성영화(無聲映畫) 시대에 크게 활약한 인물인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의 말처럼 ‘가까이서 보면 비극(悲劇)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喜劇)’인 우리의 삶에 대한 나름의 통찰(洞察)을 얻을 수 있도록 의식/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 우리가 영화를 즐길 만한 크나큰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에게나 살아간다는 것이 버거워지고 버텨내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괴로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내던지듯 등지고 멀리 떠나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럴 때 당장 뾰족한 수가 없이 갑갑한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잠시 짬을 내어 극장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영화의 러닝타임(running time) 동안 만큼은 현실과 차단된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 제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휴대폰과 스마트 워치 등은 당연히 off 해야 하겠지요.
영화는 흥미와 재미를 선사하기도 하고, 인생을 관통하며 좌충우돌(左衝右突)하는 가운데 배워야 할 삶의 중요한 메시지(message)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저의 영화 취미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 어린 예감이 듭니다.
한편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삶의 본질을 어렴풋하게나마 꿰뚫어 보게 되는 느낌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영화를 관람한 후 감상을 정리한 영화 리뷰(review)를 작성해 커뮤니티에 글을 발행하고 독자들과 공유함으로써, 나와 타인/세상과 삶의 이치(理致)/소통하는 즐거움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경험과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도 느껴보았습니다. 인상적인 영화의 한 장면과 어느 순간 귀에 꽂힌 배우의 대사 한마디에서 깊은 위로와 격려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영화를 혼자 보는 게 지루해질 무렵의 어느 날, 한 독립극장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Koreeda Hirokazu)’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Shoplifters)>을 혼자 보고 나오던 순간이 문득 떠오릅니다. 영화의 감동이라 하기에는 정서적으로 휘저어진 파동이 너무 크고 가슴이 먹먹하여 누군가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못 견딜 것 같은 감정을 느꼈던 그날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즉흥적으로 영화 커뮤니티(community) 계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작은 시작점이 되어 이후로 새롭게 만나게 된 영화 친구님들과의 만남은 즐거운 경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향이 비슷한 취미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 수다를 신나게 나눌 수 있었기에, 제가 좀 더 색다르게 영화를 즐기며 취미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살면서 삶의 아이러니(irony)가 궁금하다면 ‘아무튼, 영화’였습니다.
모순(矛盾)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접근성이 좋고 평이(平易)한 방식이 바로 영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2시간 전후의 영화 러닝타임(running time)을 기꺼이 할애(割愛)한다면, 영화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인생을 목도(目睹)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현실에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영화를 속에서 만나고, 실제로는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에피소드(episode)들을 영화를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그 다채로운 테마(Thema)들을 내 삶 속으로 끌고 들어와 대리만족을 할 수도 있고, ‘타산지석(他山之石)/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느 직/간접 경험을 통틀어 가장 손쉬운 성찰(省察)과 통찰(洞察)/공감(共感)과 위로(慰勞)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영화에 몰입하는 동안에 울고 웃고 감동하며 마음에 쌓인 감정을 순화시키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이기에 꿈꿀 수 있는 판타지(fantasy)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영화 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실감 나게 구현해 놓은 것을 보면서,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으나 해소되지 못한 욕구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영화의 크나큰 매력이라고 느낍니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꿈을 꾸는 존재이며 육신의 존치기한(存置期限)이 저물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정신적으로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을 본인이 원하는 한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영위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과 판타지(fantasy) 그 사이 어디쯤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만끽(滿喫)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藝術)일진대,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도 문학과 음악/영상을 조화롭게 버무려낸 것이 바로 영화인 것입니다. 그러한 수많은 영화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창작이 거듭되어 우리들 곁에 존재하며, 원하는 누구나가 손쉽게 향유(享有)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영화 취미를 특별한 제한 없이 이어 나갈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참 훌륭한 영화인들의 열정으로 시시각각 수많은 영화들이 계속해서 탄생하고 있고, 내 스케줄(schedule)에 맞는 시간대에 관람하고 싶은 영화가 상영되는 가까운 영화관을 찾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박스오피스(box office) 랭킹(ranking)에 오르내리는 트랜디(trendy)한 영화는 물론이고, 특별히 독립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는 제3세계영화/인디영화/독립영화/예술영화 등 다양성을 지향(志向)하는 다채로운 영화들 또한 많고도 많습니다.
이런 다양한 혜택을 받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화 관련 각종 인프라(infrastructure)를 원하는 대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만큼,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영화관을 찾을 것이고 영화 친구님들과 영화수다를 나눌 것입니다. 또한 관람한 영화에 대한 영화감상을 자유로운 글쓰기로 끄적거려 영화리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개인 계정에 나만 볼 수 있는 일기 같고 독백 같기도 한 소소한 기록의 단순 누적으로도 존재 자체가 충분히 의미롭다고 위안을 받을 수도 있었을 저에게는, 브런치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또 다른 확장성을 가져다준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작성한 영화리뷰를 브런치 계정에 업데이트(update)하고 게시글로 발행하여 독자들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제 영화 취미활동을 지속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아무쪼록 갈수록 시력이 저하되는 노안(老眼)과 자꾸 미루는 게으름을 극복하고 영화관람과 영화리뷰 쓰기 활동을 꾸준하게 이어가는 가운데,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이해(理解)와 통찰(洞察)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한 뼘이라도 진일보(進一步)하며 성숙해지고, 인간으로서 지적(知的)으로 고매(高邁)해질 수 있는 중년과 노년의 삶으로 유유히 나아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봅니다.
영화는 추억을 동반합니다.
부모님들의 노환으로 갑작스레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며 돌아치듯 살다 보니 당장의 일들에 밀려서 애초의 계획보다 너무 뒤늦게 영화책 발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수록할 영화들을 선별하고 스토리와 감상을 리마인드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현실 생활인으로서 정신없이 살던 저로서는 행복하고 뜻깊은 기회였습니다. 책에 수록하려고 선택한 영화들은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 영화를 관람하던 나날의 추억을 함께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모두에게 몇 년간 힘든 시기였던 코로나19(COVID-19) 팬데믹(Pandemic) 기간에 어렵게 극장을 찾았던 날들에 만났던 영화는 더욱 특별한 소회(所懷)로 다가왔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영화 목록에는 코로나(COVID-19) 팬데믹(Pandemic) 상황에서 정부의 집합 금지 규정과 모임 인원 제한 지침을 지키는 가운데, 어떻게든 극장을 찾고자 노력하였던 시기에 만났던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장에 자유롭게 갈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추억을 마치 어제의 순간처럼 생생하게 관통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관에 찾아가 상영관에 앉아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소중한 경험이라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껏 극장에 드나들며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 감상을 공유할 수 있는 현재의 자유로움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간 누적되었던 영화 리뷰(review) 중에서 이번에 출간하는 (삶의 아이러니가 궁금하다면) <아무튼, 영화> 책에 수록할 작품들을 선별하면서, 코로나(COVID-19) 팬데믹(Pandemic) 그 시절 제한된 소수의 영화 친구님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토론을 어렵게 이어갔던 나날의 흔적이 묻어나는 작품들을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순간을 회고(回顧)하며 의미로운 감동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영화는 아름다웠던 시절/괴로웠던 나날들을 회상하는 추억의 기록인 것입니다.
2024년 1월에 북에세이(book essay)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어쨌든, 책>을 출간할 때만 해도 곧이어서 영화책을 출간하고자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뜻하지 않던 현실적인 일들이 겹쳐서 본의 아니게 미루다미루다 이제야 뒤늦게 영화 에세이(movie essay)를 (삶의 아이러니가 궁금하다면) <아무튼, 영화> 책으로 묶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탓에 몇몇 작품에서는 좀 더 시간차가 길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템포(tempo) 늦은 시점일지언정 이렇게 영화책 출간을 실행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도 먼저 처리해야 할 당면한 일들에 급급하여 독서토론 모임을 포함한 영화관람과 영화토론 등의 취미모임을 꾸준히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때때로 조급한 마음도 들고 목마른 듯 나만 아는 욕구불만이 순간순간 스멀스멀 올라오곤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좋은 영화 작품들이 끊이지 않고 개봉되고 있으니만큼, 일상의 시간을 균형 있게 할애하여 영화관을 찾으려 노력하고자 합니다. 또한 참 좋은 영화 친구님들과의 영화수다 시간도 꾸준히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영화가 내 삶의 일부가 되고, 나의 이야기를 어떤 영화의 한 부분에서 발견하며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의미한 기회를 앞으로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앞에 놓인 생이 만만치 않듯, 저 또한 개인사의 업/다운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사다망(公私多忙)한 중년의 가을길을 걷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 악화 문제 등 이런저런 현실적인 우선순위에서 밀려 당초 계획보다 너무 늦어진 채로 이 영화 에세이북 (삶의 아이러니가 궁금하다면) <아무튼, 영화> 출간을 드디어 마무리하는 시점에 어렵사리 도달하였습니다.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수행해야만 하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가 떠오를 정도로, 해도해도 끝이 없는 숙제처럼 계속해서 쏟아지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수행해 내느라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심리적 여유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그랬기에 어떻게든 출간 작업의 끝을 맺으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는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듯한 마음입니다. 그간 자꾸 미루어 왔던 영화책 출간 작업을 부족하나마 이렇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크나큰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이 영화책 출판을 위해 어떻게든 글 쓰는 시간을 가지려 애쓰며 틈틈이 얼기설기 엮어 나간 지난 몇 달 간의 자투리 시간들을 되돌아봅니다. 저에게 글을 쓸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허용되는 소중한 기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대한 고찰을 하면서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니즈를 우선으로 존중하고 싶은 간절한 갈망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여생을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아나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조금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내 삶의 방향성을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이번 책출간의 지난하고 지루했던 준비과정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참 의미가 깊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미약하고 부실한 필력(筆力)으로나마 소심하지만 꿋꿋하게 써 내려간 저의 글을 읽어주시며, 라이크잇(Like-It)을 눌러주고 댓글로도 긍정적 공감을 해주시는 소중한 브런치 독자님들께 감사의 뜻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또한 수시로 다양한 독려 메시지를 보내주며 꾸준히 글을 써야 한다고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다음 브런치 팀에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며 소원해지고 있었던 글쓰기를 재개하며, 어느날 갑자기 멈춰버리다시피 한 제 브런치 계정에서의 글 발간을 꾸준히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끝으로 서로 다른 경향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향유(享有)하는 저의 취미생활을 늘 존중해 주었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가장으로서의 위치를 한결같이 지켜주며 저의 글쓰기에 아낌없는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는 순수하고 성실한 남편 민** 씨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특별히 표지 디자인을 결정할 때 최신 트랜드에 대해 일깨워 준 아들에게 ‘스페셜 땡큐!’를 보냅니다. 중년의 엄마와 책/영화 이야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주제로 기꺼이 소통해주었고, 인간과 삶의 품격, 그리고 문화/예술은 물론 정치/경영/사회 전반에 대해 감각적이면서도 다채로운 MZ세대(Millennials and Gen Z generation)의 시각을 엿볼 수 있도록 50대 아줌마를 시시각각으로 자극해 주며 건강하게 존재해 주는 해박(該博)하고 철학적인 아들 민** 군에게 신뢰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4년 11월 소래빛 도서관에서
김선(金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