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미유 May 10. 2024

영화 감독 (3화 바람에 날리는 깃발)

독협 워크숍의 1차 디지털 실습작은 ‘바람에 날리는 깃발’ 이라는 5분 남짓의 초 단편이었다. 일종의 공통과제인 셈인데 시나리오와 촬영지는 미리 다 정해져있었다. 촬영은 인근의 동국대학교에서 당일로 진행되는데 그럼에도 사전에 준비해야 할 요소들은 적지 않았다. 당장은 배우섭외와 대학 내 촬영장소 허가를 받는 거였는데 둘 다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실내촬영장소인 동아리방은 학생들의 동의를 얻었고 나머지는 전부 야외촬영이라 문제가 없었다. 주연배우는 연기 경험이 있는 영화과 출신 P의 친구로 섭외되었고 나머지 엑스트라들은 각자 지인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나도 당시 대학생이던 성가대 후배 수지에게 연락을 했다.

“수지야, 내가 요즘 단편영화 실습을 하고 있는데 혹시 배우로 출연해볼 생각 없니?”

“우와, 정말? 근데 저 연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대사도 없고 잠깐 나오는 엑스트라니까 문제없어. 5분짜리 영화야” 

“아, 대사가 없군요....”

수지는 그래도 배우라는 말에 뭔가 기대한 것 같은데 대사 없는 엑스트라라는 말을 듣고는 다소 바람이 빠진 듯 보였다.

“하기 싫음 안 해도 돼”

“아니에요 오빠 저 해볼래요. 언제 어디로 가면 되죠?”

나는 장소와 시간을 알려준 뒤 출연료는 없지만 촬영이 끝나면 푸짐한 저녁을 사주겠다고 말했다.

     

워크숍 인원은 팀당 4명씩 두 팀으로 나누었고 각각 촬영과 연출 두 명으로 구성되었다. 어차피 양쪽을 다 해볼 계획인데 일단 캠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나는 촬영 파트를 선택했다. 우리는 촬영 당일 아침 일찍 모였음에도 이런저런 준비로 오전시간을 날렸다. 전날 사전답사를 마치고 대강의 스토리보드까지 그려왔지만 당일 현장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일단 날씨가 갑자기 흐려져 조명을 맞추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림과 프레임 속 영상은 차이가 많았다. 오가는 학생들을 신경 쓰느라 결국 야외촬영 장소도 두 번을 옮겼고 그때마다 스토리보드를 다시 그려야 했다. 처음 잡아본 캠은 의외로 무겁고 조작이 쉽지 않았다. 정지화면은 얼추 찍었지만 카메라 무빙 샷에서는 NG를 여러 번 냈다. 결국 나는 자진해서 영화과 P 에게 캠을 넘기고 현장 통제와 정리에만 집중했다. 고작 5분짜리 영화인데 이렇게 신경 쓸 것이 많단 말인가. 초겨울의 태양은 5시가 되기도 전에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 겨우 야외촬영을 마친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양손에 각종 장비를 들고 실내촬영 장소인 동아리방으로 이동했다.

     

출연할 엑스트라 배우들은 야외촬영이 지연되면서 두 시간 넘게 대기하고 있었다. 일부는 기다림에 지쳐 집으로 갔지만 수지를 포함한 대다수는 남아있었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이들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빠진 인원은 오가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을 포섭해 머리수를 채웠다. 촬영팀은 카메라 위치 선정과 조명 설치, 연출팀은 소품 정리와 연기자들의 역할분담을 맡았다. 대사가 있는 사람에게는 대사연습을 시켰고 대사가 없는 쪽은 동선체크와 리액션을 설명하고 지시했다. 다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마음만 급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첫 실습을 잘 해내겠다는 마음만은 하나였다. 여차저차 밤 9시가 다 될 무렵 모든 촬영을 마치고 자리를 정리했다. 

“수지야 고생 많았어. 저녁 먹어야지. 뭐든 먹고 싶은 거 말해봐” 

“괜찮아요 오빠. 오늘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밥은 담에 사 주세요. 그보다 다음 주에 저희 성탄 연습 들어가는데 성가대 계속 안 나오실 건가요”

“그러게 벌써 성탄 시즌이네. 생각 좀 해보고”

아무리 그래도 성탄 연습을 빼먹을 순 없었다. 성가대에 대한 개인적 애착과는 별개로 중요한 시기에 핵심멤버로서의 책임이 가볍지 않았다.

      

촬영을 마친 다음 날 우리는 편집을 위해 다시 독협에 모였다. 촬영만큼 빡빡하진 않았지만 편집 과정도 꼬박 이틀이 걸렸다. 촬영 때는 다들 너무 정신이 없어 서로 부딪힐 여유도 없었지만 편집에는 잦은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때는 별거 아닌 걸로 투닥거리는 뽄새가 유별나다는 인상도 받았지만 결국 이런 시간들이 모여 성장의 계단을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뭐 아직은 모두 어쭙잖은 예술가 흉내만 내고 있지만 말이다. 편집을 끝내고 BGM과 자막까지 입혀 마침내 독협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 ‘바람에 날리는 깃발’ 이 완성되었다. 굳이 유치한 영화 내용을 설명하자면 흔들리는 깃발처럼 방향을 잃고 캠퍼스를 떠도는 한 대학생의 초상이라고나 할까. 뭐 우리가 대학생은 아니지만 다들 보편적 테두리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건 다를 게 없었다. 그 다음 주 나는 성가대로 복귀해 성탄미사 연습에 합류했다. MJ 역시 평소처럼 청년미사에 참석했다. 미사가 끝난 후 그녀는 늘 본당 청년들과 얘기하느라 분주했고 먼저 알은체를 했다. 내 심박수가 여전히 같은 횟수로 뛰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감독 (2화 낭희섭을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