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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Apr 05. 2024

영화 감독 (2화 낭희섭을 만나다)

독립영화협회(줄여서 독협) 워크숍 장소인 신당동의 낡은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뭔가 불길한 징조를 직감했다. 5층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계단에는 찌라시 전단과 스티커가 군데군데 나뒹굴었다.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고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마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깔끔한 대학 강의실 같은 분위기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눈앞에 마주한 공간은 그 자체가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스무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공간. 어두침침한 조명에 때가 낀 맨바닥. 한쪽 구석에 서 있는 화이트보드와 칠 벗겨진 탁자 주위의 접이식 나무의자 몇 개. 기자재실이 따로 없어 칸막이로 대충 공간을 막아놨고 난방도 안 되서 석유난로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워크숍인데 이것이 독립영화의 현실이란 말인가!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협 워크숍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머리 벗겨진 중년남성은 초면에 그 흔한 환영 인사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이름은 낭희섭.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허름한 국방색 점퍼와 벙거지 모자를 걸쳐 쓴 모양새가 영락없는 새벽 인력사무소를 기웃거리는 아저씨였다. 살면서 ‘낭’ 씨 성을 가진 사람을 평생 만날 일이 있을까.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첫인상 속에서도 영화판에서 오래 구른 예술가적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바로 독립영화협회의 대부 낭희섭이었다.

      

수강생은 나를 포함해 총 9명이고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비슷한 연령대 분포였다. 낭쌤은 앞으로 3개월간 진행될 워크숍의 커리쿨럼과 운영방식에 대해 설명한 뒤 지금이라도 그만 두고 싶은 사람은 수강료를 환불해주겠다고 말했다. 독협의 열악한 환경을 짧게나마 직면하자 봉준호와 허진호를 배출한 영화 아카데미로 방향을 틀어볼까 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낭쌤이 주는 묘한 호기심과 위압감 때문인지 그만 두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워크숍은 총 4번의 실습과정이 있었다. 두 번은 디지털, 두 번은 필름인데 3달 동안 이게 다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영화과 졸업생 한 명을 제외하면 제작경험이 전무했지만 몇 마디 말만 주고받아도 다들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주는 월요일 오전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영화 제작 이론과 카메라를 비롯한 각종 장비 실습을 했다. 강의는 낭쌤이 할 때도 있고 외부에서 데려오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이곳 출신들로 영화 현장에서 직접 뛰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름을 알 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어도 열정만큼은 뒤지지 않아서 독립영화 워크숍의 취지에 잘 맞았다. 독협 워크숍의 기본 골조는 수평적 관계의 공동 작업으로 열심히 참여할수록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 출결이 좋거나 과제를 빼먹지 않거나 아이디어를 자주 낼 경우 실습 시 카메라도 더 만질 수 있고 원하는 파트 선택에 대한 우선권도 가질 수 있다. 처음엔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너무 빡빡하다는 불평도 있었지만 이건 장기간 독협 워크숍을 운영해 온 낭쌤의 철학이었다. 기회는 잘하는 사람보다 열심히 한 사람에게 주겠다는 원칙.

      

낭쌤의 독특함은 첫날 점심을 같이 먹을 때도 드러났다. 식당에 들어가서 뭘 먹을지 메뉴를 물어봤는데 김치찌개와 된장찌개가 나오자 지체 없이 여기 김치 셋, 된장 둘! 을 외쳤다. 사람이 열 명인데 다섯 개만 시킨다고? 그는 공기 밥만 인원수대로 더 추가하면 된다 말했고  주인도 군말 없이 그대로 메뉴를 가져왔다. 아니, 우리가 좀 없어 보이는 건 맞지만 이래도 되나 싶었다. 낭쌤은 식당 주인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근처에 이런 식으로 주문하는 곳을 몇 군데 픽업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양은 부족하지 않았고 덕분에 점심값은 많이 절약되었다. 식사비용은 100원 단위까지 정확히 자르는 더치페이고 선생이라고 쏘지도 않고 얻어먹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알뜰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거지근성이라고나 할까, 그의 이런 기질은 워크숍동안 내내 발휘되었다. 특히 어떻게 알았는지 문어발처럼 퍼져있는 영화계 인맥들을 활용해 공짜로 뭘 먹거나 가질 수 있는 행사나 자리에 우리를 자주 데려갔다. 왠지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땡전 한 푼 없어도 생활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는 빈곤한 대한만국 독립영화 시장의 밑바닥에서 바득바득 생존해온 그의 근성으로도 느껴졌다. 어리둥절 첫 주를 보낸 뒤 우리는 본격적인 1차 디지털 실습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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