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을 앞두고 나는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실업 자체는 익숙한 상태지만 다시 돌아갈 일이 없을 거라 자신했기에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IMF를 졸업했다고 하지만 취업시장은 여전히 가혹했다. 무엇보다 새로 시작할 동력과 의지가 바닥난 상태였다. 프로그램 개발 회사로 눈을 돌리면 갈 곳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그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기 싫었다.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특기나 이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도 더 이상 취업을 재촉하지 않았다. 포기한 건지 아니면 지금은 가만두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는지 적어도 내 앞에서는 취업의 ‘취’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즈음 대한민국은 2002 한일 월드컵으로 들끓어 올랐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그래, 어차피 이리 된 거 월드컵의 파도에 올라타서 안 좋은 기억들을 떨쳐내자. 나는 그 어렵다는 한국전 예선 3경기 예매를 부단한 클릭질 끝에 성공했다. 취업은 못해도 이런 건 잘하는구나. 그 덕에 폴란드전 첫 승의 감격과 박지성의 16강 진출 원더골을 모두 직관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해 6월은 다들 알다시피 온 나라가 축구에 미쳐있었다. 붉은 색 티셔츠가 거리를 뒤덮었고 술집은 역대급 호황에다 남녀노소 불문 만나기만 하면 축구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이 다시 월드컵을 개최하고 4강을 또 간다 해도 이때의 흥분과 감동을 재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월드컵 8강 스페인전이 열리던 날, 나는 성당에서 청년부 사람들과 단체 응원을 했다. 이운재의 선방과 승부차기 승리로 4강 진출이 확정되자 우리는 낮부터 술집에 자리를 잡고 부어라 마셔라 퍼마셨다. 월드컵 역사상 단 한 번의 본선승리도 없던 한국이 4강이라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독일을 이기고 결승으로 가자며 다 같이 잔을 들었다. 한창 취기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중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에서 한 여인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그때만 해도 내가 취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취하면 엔간해선 다 예뻐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녀가 바로 MJ 였다.
사실 MJ의 얼굴을 사진으로 한번 본 적은 있었다. 한 성가대 후배가 우리 본당에 예쁜 애가 한 명 들어왔다며 사진을 보여줬었다. 당시에도 예쁘다는 생각은 했지만 단체로 찍은 사진에다 해상도도 떨어져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도전했던 독일과의 4강전은 1:0 패배로 끝나며 결승진출이 좌절되었다. 아쉬움 속에 나간 주일미사에서 나는 드디어 맨 정신으로 MJ 와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은 사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조물주가 먹다 남은 재료로 대충 나를 만들었다면 MJ 야말로 온갖 공을 들어 빚어낸 미의 창조물이자 순결한 불꽃이었다. 같은 MJ 인 마이클 조던과 마이클 잭슨조차 평범하게 만드는 저 광채의 아우라는 무엇인가. 그녀를 보고도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사내 축에 끼지 못할 것이다.
MJ 는 다삼어미라는 청년부 장애인 봉사 단체에 속해 있었다. 정상적인 루트라면 다삼어미에 들어가 그녀와의 접점을 마련하고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마땅했지만 그때의 나는 정신과 육체가 모두 병들어있는 상태였다. 아아~ 이 불결한 몸이 어찌 당신처럼 맑은 영혼을 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여타의 하남자들처럼 혼자 소설의 기승전결을 써내려가며 제풀에 나자빠졌다. 그녀는 노란색 티를 자주 입었는데 마치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보였다. 살포시 미소를 지을 때면 몇 미터 밖에서도 그 향기에 취해 신경이 마비될 것 같았다. 만일 동그란 안경을 벗고 저 작고 야릇한 반달눈까지 드러낸다면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내가 그녀와 가까워질 확률이 백만분의 일이나 될까. 꿈은 이루어진다~ 는 축구 대표팀 조차 깨진 꿈을 나 따위가 이룰 순 없지 않는가.
결국 성당에 발을 끊기로 했다.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지만 설마 진짜로 죽진 않을 테고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바빠야 생각 자체를 덜할 텐데 한가하다 보니 MJ 의 잔상은 아무데고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뭔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일 만한 일을 찾아야겠다 결심할 무렵 씨네21의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독립영화협회 워크샾 수강생 모집. 그때의 나는 영화광까지는 아니어도 영화를 꽤 많이 보는 사람이었다. 당시엔 카드할인 제도가 많아 무료나 싼 값으로 영화를 볼 기회가 잦아 틈나는 대로 영화관을 찾았다. 주류 상업영화뿐 아니라 비주류 다양성 영화들도 많이 봤는데 이때가 내 삶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접했던 시기였다. 수강료도 의외로 저렴하고 무엇보다 실습 위주 커리큘럼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이 빡빡하게 채워진 점이 맘에 들었다. 이참에 영화를 한번 만들어볼까? 혹시 잘 되면 영화감독으로 데뷔 할 수도 있고 안 되도 나름 MJ 를 잊고 인생 경험 하나 쌓는 비용이라면 나쁠 게 없었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고 지체 없이 독립영화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