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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Mar 15. 2024

프로그래머 (5화 회사는 당신에게 바라는 게 없습니다)

삼성카드의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SieBel CRM 개발 프로젝트라 불렀다.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반조롱식으로 SieBel 을 일컬어 씨발 프로젝트라 불렀는데 씨발! 씨발! 욕 나올 정도로 힘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기존에 담당했던 마케팅 파트 개발팀에 배정되었는데 시작 단계라 아직은 팀의 의미와 역할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마침내 프로젝트의 총괄 PM을 위시한 모든 개발자가 대강당에 모였는데 어림잡아도 150명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부딪힌 장벽은 영어였다. 영어라고 하니 외국인과 같이 일하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물론 외국인이 없진 않았지만 개발자는 전부 한국인) 그런 건 아니고 영어로 진행되는 업무와 대화들이 많았다. 도입하는 패키지의 매뉴얼부터 시작해 기겁할 정도로 많은 개발 문서의 자료들은 대부분 영어였고 그것도 일상 회화와는 관련 없는 IT 전문 용어들이 빽빽했다. 학창 시절 내내 영어 콤플렉스로 고통 받았기에 문서를 보자마자 알레르기가 발생했고 IT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한글로 번역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천지였다. 

     

그 다음 문제는 업무 환경과 분위기였다. 위에서 오더를 받아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 알아서 할 일을 파악하고 익혀야 했다. 여기가 회사인지 학교인지 모를 정도로 다들 모니터 앞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고 프로그램을 분석하기 바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잃었고 지난번처럼 남한테 일일이 물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각자 익히고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보니 남을 챙길 여유가 없었고 야근도 기본이었다. 나는 업무시간 내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서를 뒤적거리거나 모니터 앞에서 의미 없는 클릭질만 했다. 회의 시간에는 입을 꾹 다문 채 멀뚱멀뚱 눈만 껌뻑이다 일어났고 자체 스터디 과제도 수행하지 못했다. 개발자 전원이 돌아가며 총괄 PM 앞에서 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발표 시작 5분도 되지 않아 그만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한 마디로 나는 이곳에서 바보가 된 것이다.

     

결국 참다못해 조 과장에게 SOS를 쳐서 고충을 털어놓았다. 

“카미유씨 경력으로 쉽지 않은 프로젝트라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여유를 갖고 일하다 보면 적응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마음은 계속 조급해지고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는 건 전혀 없었다. 팀원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들이 나빠서 따돌린 게 아니라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거리를 뒀고 어차피 일적으로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이라 그들에게 나라는 사람은 전혀 필요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진작에 바닥을 찍었고 아침에 눈을 떠서 현관을 나서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기를 두어 달. 밤새 잠을 설치고 월요일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짓눌렀다. 무작정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 도망가자. 그날 아침 나는 핸드폰을 끄고 수원역으로 가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올랐다. 종점인 목포행 티켓을 끊고 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와 보는 목포. 상태가 상태인지라 목포의 푸른 바다와 유달산은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작정 목포 거리를 돌아다니다 더 먼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 제주행 페리에 올랐다. 화투판이 벌어지고 있는 3등석 바닥의 구석에 널브러져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며 제주항에 도착했다. 밤이 되어 근처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 그제야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치 마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내가 한 행동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일단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음날 새벽 서울로 올라왔다. 핸드폰을 켜자 집에서 여러 통의 전화가 온 걸 확인했고 회사 전화는 딱 한 통이었다. 먼저 집에 전화를 해서 가족들을 안심시킨 뒤 회사로 향했다. 조 과장을 비롯한 팀원 몇 명은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없어진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잠시 후 조 과장은 나를 따로 불러내 자초지종을 물었다.                

“더 이상 일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형편없이 모자라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계약서에 중간 퇴사 관련 조항이 있는데 위약금을 물더라도  저는 하루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조 과장은 무표정하고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회사는 카미유씨에게 바라는 게 없습니다.”

“네?”

“그리고 위약금 같은 건 생각하지도 마세요. 그런 하찮은 건 회사에서 신경도 안 쓸 테니 팀장에게 찾아가 퇴사일자 조율하도록 하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름 저를 생각해서 불러주셨는데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앞으로 뭘 하실지 모르겠지만 잘 되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회사가 바라는 게 없다는 조 과장의 말에는 중요한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어차피 나는 초보 개발자고 회사도 그걸 다 인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렇게까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 나 하나의 존재는  아무런 영향도 없으며 이에 따른 책임을 질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마치 내가 특별한 존재라도 된 양 자의식 과잉과 강박에 사로잡혀 현실을 파악하고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차근차근 공부하고 익히면서 팀원들 사이에서 적당히 묻어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때의 나는 확실히 철이 없고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좁았다. 그렇게 실패를 겪고 난 뒤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고 역사적인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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