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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Jun 05. 2024

영화 감독 (4화 영화를 만든다는 건)

2차 디지털 실습을 앞둔 우리는 적당히 들떠있었다. 10분짜리 짧은 실습용이지만 어쨌든 영화는 영화고 기획부터 시작과 끝을 모두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컸다. 적어도 이 순간엔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두려움보다 막연한 자신감이 한발짝 앞서나갔다. 틈만 나면 영화와 관련된 수다를 떨었고 멋진 영화를 만들겠다는 허세에 차 있었다. 이런 일은 이성적인 계산보다 감성적인 접근이 도전의식을 고취하는데 유효할 때가 많다.        


하지만 출발점인 시나리오 작업부터 감성의 영역이 무너지고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각자 머릿속에 구상한 시나리오를 줄줄이 떠들었지만 주어진 예산, 시간, 인력의 범위에서 찍을 수 있는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이 사람들 언제 다 섭외할래?

- 우리 실력에 치고받는 액션 신을 찍겠다고? 주변에 아는 무술인이라도 있니?

- 대기업 사무실 촬영 허가는 어떻게 받으려고? 입구부터 쫓겨날 걸.

- 이거 소품비만 해도 수 십 만원 바로 깨진다. 우리 저녁 먹을 돈도 없는 판국에.

계속 안 돼, 안 돼만 주고받다 맥이 빠졌다. 누군들 봉준호, 박찬욱처럼 때깔 나는 장면을 찍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고 싶은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영화를 찍어야만 했다. 결국 소심하고 강박증 심한 한 남자의 하루를 담아내는 짧은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다들 표정을 보니 떨떠름한 분위기였지만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등장인물은 남녀 두 명으로 고정시키고 촬영지도 헌팅이 용이한 곳 위주로 선별했다.

       

그래도 배우만큼은 경험자를 쓰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전문 연기자는 출연료를 지불할 수 없는 관계로 몇몇 대학의 연영과 게시판에 모집공고를 올렸다. 공고 이틀째 되던 날 마침내 한 명의 연영과 남학생이 독협을 찾아왔다. 호감 가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시나리오 속 남자 역할로 나쁘진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찾아와서 인사를 교환한 뒤 대뜸

- 오디션을 봐야 합니까?

내심 지원자가 폭주하면 나름 오디션을 볼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아온 사람은  그가 유일했고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일단 붙잡아 놓기로 했다. 사실 연기에 무지한 우리들이 전공자 앞에서 연기가 어떻다 저떻다를 평가하는 것도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 아닙니다. 대본은 보셨을 테니 알아서 잘 하시겠죠. 저 근데 연영과니까 혹시 여주 하실 분 한 명만 섭외 가능할까요?

염치없지만 내친 김에 여주 캐스팅도 끝내고 싶어 밀어붙였다. 어차피 여주는 비중이 적어서 그의 연영과 지인 아무나 데려오면 된다고 여겼다. 그는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다음 날 짙은 화장의 예쁜 여학생 한 명을 데려왔다. 둘이 너무 친해 보여 혹 사귀는 사이인가 의심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같이 서 있으면 남자에 비해 튀는 외모가 거슬리긴 했지만 덕분에 캐스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메인 촬영지는 총 세 곳으로 신촌에 있는 카페, 레코드점, 일반 가정집이었다. 카페와 레코드점 모두 손님이 적은 평일 낮 시간에 촬영 허가를 받았다. 첫 번째 장소인 카페는 박카스 한 통을 사들고 애원해서 겨우 섭외가 이뤄줬는데 역시나 촬영은 여의치 않았다. 약속했던 두 시간동안 사장은 중간 중간 대놓고 언제 끝나냐며 눈치를 줬다. 장사하는 업주 입장에서 이해는 되지만 어차피 장소제공을 약속했으면 좀 편안히 대해줬으면 어땠을까. 역시나 시간에 쫓긴 촬영은 만족할만한 씬을 건지지 못했다. 하지만 레코드점은 달랐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현장을 분주히 세팅하던 중 가게를 보던 알바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 혹시.... 카메라에 저도 찍히나요?

- 안 찍히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그게 아니라 저도 영화에 출연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 네?? 아.... 대사 없이 화면에 잠깐 나오는 건 되지만 그 이상은 곤란.....

- 그 정도면 됩니다. 저기 잠깐만요.

알바는 곧바로 사장에게 전화를 건 뒤 마음 놓고 해도 된다는 말을 했다. 덕분에 우리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오후 내내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다. 이 알바는 한술 더 떠 스스로 손님들 통제도 하면서 스텝처럼 활동했다. 나중에 완성된 영상을 꼭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기분 좋게 레코드점을 나왔다.     


실내 촬영의 마지막 장소는 독협 멤버의 이모집이었다. 찍다 보니 촬영 각이 나오지 않아 가구와 물건들을 여러 번 재배치했다. 밤늦게 촬영을 끝내고 나니 집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죄송한 마음에 사과를 드렸더니 이모님은 일단 밥부터 먹으라고 푸짐한 저녁을 차려주셨다. 정리를 끝내고 나자 이모님은 고생했다며 과일과 간식까지 챙겨서 돌려보냈다. 몸은 천근만근으로 피곤했지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이깟 영화가 뭐라고. 레코드점 알바의 선의와 이모님의 따뜻한 배려를 받으며 우리는 모든 촬영을 마쳤다. 배우들의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 같은 초짜들은 아무리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티가 나기 마련인데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걸 보니 역시 연영과 출신이라 다르긴 달랐다.      


그 무렵 성가대는 성탄합동 성야미사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고심 끝에 나는 MJ 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절 의사를 받아낸 뒤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줄 가능성은 1도 없었다. 사실 그때의 나는 MJ가 아닌 누구라도 실패했을 것이다. 자신감도 없고 자존감은 바닥. 상사병과 취업 스트레스로 살이 빠져 몰골은 굶주린 아프리카 난민 같았다. 고백 D-Day는 다음 주 청년미사 후로 잡았고 독협 워크샾은 하이라이트인 16밀리 필름 작업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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