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 인근에 위치한 애견간호아카데미는 김씨 성을 가진 두 원장이 대표로 있고 근처에서 동물병원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수강생들 사이에서는 큰 김, 작은 김이라 불렀다. 상호가 동물간호아카데미가 아니라 애견간호아카데미인 건 지금처럼 묘 인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돈만 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력서도 제출하고 면담도 꽤 길게 진행하면서 나름의 형식적인 절차는 다 거쳤다. 이력서를 꼼꼼히 살피던 큰 김은 갑자기 활짝 웃더니
- S 대 유전공학과라.... 공부를 잘하셨네요. 이런 곳에 오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동물을 정말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렇잖아도 남자 수강생이 적은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이런 곳에 오실 분이 아니라니, 그럼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 분이란 말인가. 사실 개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애견사업에 반강제로 끌려왔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이력서만 해도 그렇다. S 대 유전공학과를 졸업한 건 맞지만 학사경고에 성적표는 온통 C,D 학점으로 도배되어 졸업도 겨우 한 떨거지 학생이라는 걸 큰 김은 알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애견간호아카데미의 수업 과정은 이론과 실습으로 나눠지는데 실습은 크게 간호와 미용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큰 김은 주로 병원에 상주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업은 작은 김이 맡고 있으며 미용 파트만 따로 담당 강사가 있었다. 수강생은 10 ~ 15명 정도였는데 그 중 남자는 나를 포함해 3 명이고 대부분은 이십대 초중반의 어린 여성들이었다. 얼핏 봐도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아 보였는데 그나마 삼십대 누님 한 분이 계신 게 다행이었다. 당연하지만 수강생들 얼굴에서는 강아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학원 내에 돌아다니는 실습용 강아지들을 너도 나도 쓰다듬고 껴안고 뽀뽀하는 등 애정을 과시했다. 가만히 있으면 별스런 학생으로 취급받을까봐 나도 강아지의 이름을 불러가며 따뜻한 애견인 코스프레를 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은 이론수업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전혀 어려운 점은 없었다. 아무리 대학 수업 때 개판을 쳤어도 나름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원서 교재로 공부한 경험이 있는데 백 페이지 남짓의 한글 교재와 몇 안 되는 프린트 물을 달달 외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하루 종일 집에만 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고 무지성 암기에도 강한 스타일이었다. 예상대로 나는 자체 시험에서 수강생 중 유일한 만점을 받았다.
- 잘하실 줄 알았습니다. 역시 유전공학과 나오신 분이라 그런지 다르네요.
큰 김은 자신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검증이라도 한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말 중 일부는 맞다. 대학에서 배웠던 내용 중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확장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이 정도는 단순한 의지와 노력의 문제였다. 분명한 건 적어도 이때까지는 내가 큰 김의 기대에 뒤통수를 칠거라는 생각은 서로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용 실습은 예상대로 이론 수업처럼 쉽지 않았다. 강아지 보라를 품에 안은 미용 강사가 바리캉을 손에 쥐고 시범을 보인 후 수강생들이 돌아가면서 털을 밀었다. 대상이 강아지지만 미용이라는 단어가 붙은 만큼 감각의 영역을 배제할 순 없어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보라를 안은 채 바리캉을 갔다댔다.
- 괜찮으니까 좀 더 깊이 집어넣으세요.
혹 살이라도 베일까봐 소심하게 깨작거리고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강사는 자신 있게 밀라며 재촉했다. 뜬금없이 학창시절 교문 앞에서 바리캉으로 머리에 고속도로를 낸 악마 같은 선생님이 떠올랐다. 나는 그래선 안 돼. 보라가 내 새끼라 생각하자. 자식의 털을 함부로 미는 부모는 없잖아. 온 신경을 집중해서 털을 조심조심 밀며 간신히 내 순서를 마쳤다. 그게 뭐라고 손이 떨리고 이마에 땀까지 맺혔다. 문득 사람들에 둘러싸여 미용 마루타가 된 보라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라 술자리도 잦았다. 술을 좋아하는 작은 김은 수강생들과 늦게까지 동석하며 술을 마셨다. 어린 동생들이 많아 서먹하고 어색해도 나는 술자리를 빠지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지만 한편으론 관계에 목말랐던 게 아닐까. 사람에겐 모름지기 주변 환경이 중요하듯 이들과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강아지에 대한 없던 정도 생길 것 같았다. 비록 내 의지로 온 건 아니지만 어쩌면 잘 해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피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가장 핵심인 간호 실습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미용 실습 때의 그 떨림이 예사롭지 않은 신호라는 걸 나는 진작 눈치 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