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제국 , 강성과 쇠망의 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콘스탄티노플과 로마가 멸망한 이유는 내부의 부패 때문이다>라고.
영화를 보고 의아한 것은, 콘스탄티노플(동로마)과 로마(서로마)를 따로 떼어내어 말하고 있는 점이다.
한 지붕 두 국가였던 로마는 늘 로마로 통칭하여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나도 아주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로마제국의 수많은 도시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아울러 이 둘의 멸망의 원인을 '내부의 부패'라고 군더더기 없이 콕 집어 말한 것은 저으기 식상했다. 하긴 초대형 오락영화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된다.
로마를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영화, 소설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서 굳어진 고정관념 때문일까.
내게 로마는 늘 '화려하게 부패한 도시'이다.
검투사, 콜로세움, 콜로세움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황제, 불타는 로마를 내려다보며 시를 읊조리는 영양과잉 상태의 네로 황제, 이름만으로도 잔인함이 묻어나는 칼리큘라 황제, 노예의 노동으로 권태로운 쾌락을 즐기는 귀족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의 난 등등...
아닌 게 아니라 로마를 다룬 책들은 제목부터 대체로 부정적이다,
제국의 쇠함과 망함을 강조하고 있는 로마제국쇠망사도 그 예이다. 책꽂이의 책을 좌르륵 훑으니 ' Rotten Roem'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한 권짜리 어린이판 로마제국이야기 영문판 제목은 <부패한 로마>이다. 부패하니 기운이 쇠하고 기운이 쇠하니 망하는 것이다. 이 단순하지만 확실한 정답 앞에 이견이 없다. 천 년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하면 사실이 그러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순하고 확실한 정답에 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다,
어떻게 로마는 천 년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냐고 말이다.
동서고금에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는 로마와 관련한 속담을 떠올려 본다.
1.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중세를 상징하는 푹푹 빠지는' 진창길이 아닌 반듯한 돌 길로 사통팔달 막힘없는 교통망을 만들어 놓고 있으니, 로마의 대규모 길은 교역과 무역은 물론이고 말 달리고 전차 달릴 수 있는 대규모 전쟁에도 용이했을 것이다.
도로를 따라 만들어진 수로며 상하수도 시설 등도 로마인의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한 자랑거리일 터다.
로마로 통하는 모든 길은 로마제국의 힘을 상징한다.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이고 북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로마의 휘장 아래로 끌어모았으니 말이다.
북유럽이든 중앙 유라시아든 아프리카든 어디서 출발하든 가다 보면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로 통하는 모든 길은 이민족의 손쉬운 침입과 전염병의 확산을 도와주며 로마 멸망을 앞당기는 길이 되기도 했으니, 길에는 일방통행이 없는 법이다.
2.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른다.
로마는 태생부터 전쟁과 약탈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웃 부족 여자들을 뺏어오던 최초의 약탈 이후 수많은 부족과 민족이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고 세금을 뜯겼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하지만, 전쟁과 약탈로 일어선 로마는 칼로 망하기 전에 법으로 정비된다.
기번은 로마법 이야기로 책의 한 챕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세기간 동안 수없이 다듬어지고 보강된 로마법을 읽다 보면 현대국가의 법률과 흡사한 점도 많다.
약탈로 인해 수시로 창출되는 부를 분배하는 문제가 결국 광범위한 민법 체계의 정비에 기여했다는 기번의 이야기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도둑질을 한 자는 오른손을 자르는'고대법보다는, 도둑질 한 자에게 훔친 물건과 함께 위자료까지 배상하게 하는 법질서가 더 합리적이다.
징벌적 보복으로 오른손 댕겅 잘라봐야 피해자도 별 이득 될 것 없고, 가해자를 먹여 살리기 위한 사회적 비용만 발생하지 않겠는가.
결국 로마는 광대한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행정시스템과 그것을 지탱하는 법 체계로 인해 오랜 기간 번영을 누렸다는 생각이 든다.
3.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로마제국쇠망사 전 6권을 읽으면서 새삼 놀란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것이다.
로마의 위인 열전이라 하면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정도만 알고 있었다만, 책 속에 소개된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역사적 매락 속에서 나름의 감동을 준다.
기독교 인들에 의해 살해된 최초의 여성 수학자인 히파티아의 짧은 삶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고, 그 아쉬움만큼 종교의 광기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로마제국에 눈치 안 보고 자신이 믿는 종교를 국교로 재선포하는 기인이며 영웅인 율리아누스 황제의 일대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권력욕과 명예욕과 물욕 없이 평생 로마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낮은 민도로 결국 로마 백성들에게 배신당하는 안타까운 황제 이야기는 우리나라 모 전직 대통령을 떠올리게도 했다. 이 황제는 사후 재평가되어 칭송을 받으니 이 또한 비슷...
로마제국 천년의 역사에는 이름은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들에 의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영웅과 위인들이 있었다. 심지어 야만족이라 불리며 멸시받던 이들이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여 훌륭한 섭정을 펴기도 했으니 로마는 절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사족>
해보지 않은 게 있다는 것은 한편 좋은 것이다.
앞으로 해볼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가 있으므로.
계약직 노동자라 벌이가 시원찮아도 차개차개 돈도 모아놓고 장성한 애들 돈도 좀 뜯어서 로마를 샅샅이 다녀보고 싶다.
유명한 유적지는 피해서 조용히 천천히..
겸사겸사 지근거리인 그리스에 들러서 '카찬차키스' 무덤 앞에 참이슬 한 잔 놓고 사과 말씀도 전할 참이다.
20대의 오랫동안 그대의 이름을 <카잔차스키>로 알고 있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