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와 우파

by 엄주명

“너는 좌파니? 우파니?”라는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님 “나는 좌파야.”나 “난 우파야.”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잘 들어본 적이 없거나 들어보더라도 그 이야기를 깊숙이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뿌리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도 다르다. 또, 그 경험에 따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이념도 다를 수 있다. 혹은 경험에 따라 각자만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급속도로 이룬 나라이기에, 식민지배와 군사독재가 이뤄졌던 나라이기에 사회에 아픈 부분이 많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고 아직 사회는 완벽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념갈등도 심하고 지역갈등도 심하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 좌파와 우파의 이야기, 정치적 논쟁을 피해왔을지도 모른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때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정치적 논쟁을 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정치적 논쟁을 들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듣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좌파, 우파라는 개념이 정의된 상태에서의 대화인가? 의외로 많은 이가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이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미 없는 논쟁을 할 때가 있다. 지나친 진영 논리로 빠져 각각의 사건에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감정적인 싸움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물론 좌파와 우파를 명확히 정의하기란 힘들다. 우선 좌파와 우파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면 프랑스혁명 직후이다. 프랑스혁명 직후에 급진파와 온건파가 있었는데 급진파는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 온건파는 오른쪽에 앉으면서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이 생겼다. 좌파가 주로 추구하는 가치, 우파가 주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것이다. 다양한 분류 기준이 있겠지만, 오늘날 대표적으로 통용되는 좌파와 우파의 가치로는 각각 ‘평등’과 ‘자유’이다. 이런 가치에 입각해서 좌파는 사회주의적 이념, 우파는 자유주의적 이념을 추구할 수 있다. 경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국가계획경제와 시장자유주의로 생각할 수 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자유주의’만으로 국가가 운영되지 않았고, ‘사회주의’만으로도 국가는 운영할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합의한 이념적 정치 토대가 있다면 ‘민주주의’ 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완벽한 체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그나마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체계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각자의 이념을 추가한다. 사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등이 그런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좌파와 우파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것이지 어느 한쪽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내 이념을 옳고 너는 틀렸어!”라는 논리로 접근해서는 논쟁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조금 더 건강한 논쟁이 시작되려면 좌파와 우파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임을 인지해야 한다. 더 나아가 두 이념 모두 소중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도 인지한다면 좋은 논쟁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만 국가는 좌파와 우파의 이념 논쟁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상당히 많다. 어느 사안에 대해서는 좌파적 태도를 취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안에서는 우파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그것이 논리적 비약이거나 잘못된 인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어느 한 진영의 논리로만 사안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정당에 소속되어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당 이념을 강하게 추구하는 성향이 나타날 수 있다. 다만 그렇지 않다면 특정한 정당의 이념만을 모든 사안에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사회안전망 보장, 사회서비스 확대, 사회보험 등이 굳이 좌파적 성향을 가진 사람만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좌파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 앞선 제도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기본소득 제도’는 좌파와 우파의 진영 논리로 찬반을 가릴 수 없는 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기본소득 제도’는 좌파이기에 찬성한다든지, 우파이기에 반대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논리로 접근한다면 합리적 논쟁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좌파적 성향 혹은 우파적 성향을 가질 수는 있다. 또, 자신의 정치 성향이 바뀔 수 있다. 다만 ‘좌파이기에’, ‘우파이기에’라는 논리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새는 양 날개로 난다.”라는 말이 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중요한 개념이고 가치이다. 물론 새의 양쪽 날개는 모두 건강해야 잘 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 진영은 건강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많은 이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우선 한국의 원내 정당을 살펴보면 두 정당의 힘이 막강하다. 현재 교섭단체로 구성되어 있는 정당은 두 정당뿐이고, 이론적으로 두 정당만 합의에 이른다면 법률을 만들고 폐기하는 국회의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정치 진영을 ‘양당제’라고 부른다.

양당제인 한국 정치에서 두 당은 좌파와 우파를 각각 대변하고 있을까. 흔히 언론과 대중은 ‘더불어민주당’을 좌파, ‘국민의힘’을 우파라고 부른다. 좌파와 우파의 일반적인 의미를 대입해 본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필자는 한국 정치 진영이 좌파-우파 대결 구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기득권 세력 모두 능력주의라는 거시적 모델을 근거로 공정 담론을 앞세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한다. 여기에 ‘평등’이라는 가치, ‘자유’라는 가치는 숨어버리곤 만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제20대 대통령인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매번 강조했다. 하지만 후보 시절에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가 뭔지 모를뿐더러 자유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선택적 자유를 이야기했다. 없는 사람들은 부정식품의 아래도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줘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자유를 가장한 억압인 것이다.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도 ‘자유’의 가치를 지키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그린 ‘윤석열차’라는 작품이 수상하자 자신을 풍자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최 측에 경고를 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표현의 자유마저 없었다. 자유를 표방하는 정당마저 ‘자유’를 탄압하기도 한다. 오히려 과거 ‘자유’를 위해 싸웠던 운동권 세력이 ‘좌파’를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이런 기형적인 한국 정치 진영이 나타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양당제에서는 특정 정당의 실패가 남은 정당의 대안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국민은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국 정치 진영이 땅따먹기처럼 진행되고, 아무리 정치가 이상하게 흘러가더라도 시민의 심판이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양극화는 지속적으로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좌파와 우파의 개념이 한국 정치 진영, 언론, 시민 모두가 혼동하고 있고 지나친 지역주의, 이념주의로 스며들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깨뜨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정치 진영, 선거 제도, 좌파와 우파의 개념 정립 등에 질문을 하나, 하나 던져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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