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제 밖에서 발생한 사건을 작업 안으로 들이는 일
형태를 입히기 시작하면 작업은 더 이상
온전히 나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대로 흘러가지 않고,
계획한 결과에서 미묘하게 벗어나며,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흔히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곤 하죠.
“망했다.” 혹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
하지만 작업을 오래 지속하다 보면,
바로 그 당혹스러운 순간이야말로
작업이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연은 실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팽팽하게 조여졌던 통제가
처음으로 느슨해진 자리에서 발생하는 생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위로 떨어지는 공짜 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한계를 향해 충분히 밀어붙인 이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재료를 다루는 손의 오랜 습관, 반복된 선택의 리듬, 긴 시간 쌓인 감각의 편향.
이런 내면의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작은 어긋남이 바로 우연입니다.
그래서 우연은 외부에서 침입한 불운한 변수가 아니라,
작업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우연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많은 경우 우연은 계획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잡음처럼 취급됩니다.
처음의 의도와 다르다는 이유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지워지거나 두꺼운 물감 아래 덮여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연을 서둘러 제거해 버릴수록
작업은 다시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궤도로 돌아가고,
화면은 매끄럽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어딘가 권태로운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우연을 붙잡는다는 것은 그 어긋남을 즉시 수정하지 않고,
잠시 멈춰 서서 지긋이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왜 이 지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흔들림이 내 작업의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
우연은 종종 우리가 애써 숨기려 했던 핵심을 정직하게 폭로합니다.
감추고 싶었던 불안, 인정하기 싫었던 욕망,
혹은 생각보다 훨씬 정확했던 나의 본능적인 방향감각을 말이죠.
캔버스 위에서도 우연은 분명한 신호를 보냅니다.
의도하지 않게 번진 물감의 얼룩,
계산 없이 무심히 겹쳐진 선,
계획과 어긋난 버린 뜻밖의 여백.
그것들은 모두
“여기서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생존 신고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흔적을 즉시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낯선 흔적이 작업 전체에 어떤 새로운 긴장과 리듬을 만들어내는지를
끝까지 인내하며 지켜보는 일입니다.
우연을 작업 안으로 들인다는 것은
통제를 전면적으로 포기하는 방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통제의 방식을 바꾸는, 고도의 지적 행위에 가깝습니다.
처음의 계획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고집하는 대신,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새로운 기준으로 삼는 유연한 태도.
이때 작가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설계하는 전능한 지배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예리하게 해석하고 선택하는
감각의 중재자가 됩니다.
물론 모든 우연을 금금보화처럼 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연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우연을 붙잡고 어떤 우연을 흘려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안목입니다.
이 흔들림이 작업을 더 깊은 층위로 이끄는지,
아니면 단순한 혼란에 그치는지.
그 서늘한 판단은 결국 앞선 좌표들—고유성,
깊이, 결정—을 통과한 작가만이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연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것을 재료로 삼을 수 있는 용기,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그 붕괴의 형태를 끝까지 응시하는 인내.
우연을 붙잡는다는 것은 결국,
작업이 나보다 조금 더 앞서 달려가도록 기꺼이 허락하는 일입니다.
이 좌표는 “어떻게 완벽하게 통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작업에서 실제로 무엇이 발생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작업은 더 이상
머릿속의 설계도를 재현하는 죽은 노동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함께 호흡하는 살아 있는 과정이 됩니다.
우연은 작업을 망치러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업이 스스로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보내는 첫 번째 신호입니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붙잡을 수 있을 때,
작업은 비로소 나의 좁은 의도를 넘어서는
낯설고도 아름다운 깊이를 획득하게 됩니다.
좌표 23. 우연
우연은 계획의 실패가 아니라,
작업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