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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의 단비 Oct 01. 2021

절대로 영원한 것


   타일 바닥에 매우 둔탁한 쿵 소리가 났고 몇 초 뒤 린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소파 위 내 옆에 있었는데, 린지를 부른 찰나 소파 뒤편으로 이 녀석이 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내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들숨 끝에 목구멍까지 숨을 머금은 채 린지를 안아 올렸다. 동공에 초점이 없고 몸은 굳어있다.


"린지야, 병원 가자."

다급하게 린지를 안은 채로 차키를 찾는데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들고나가야 할지 몰라 거실을 뱅뱅 돌고 있는 나를 알아채곤 정신 차리자 몇 번을 되뇌었다. 그래야 이 녀석이 불안하지 않을 테니. 현관에 걸어둔 비상용 차키가 생각났고 현관으로 달려가 차키를 빼들곤 집을 나섰다. 닫힌 현관문 뒤로 린지의 동생 루미가 놀란 목소리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차량에 올라타 늘 장착되어있는 강아지 카시트에 린지를 태우고는 올해로 12년째 다니는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병원은 강남 한복판인데 우리는 분당으로 이사를 왔으니 퇴근시간인 6시에 강남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린지를 오래 봐 온 병원 매니저님이 분당에 살고 계시다는 정보가 뇌리에 번뜩인 터였다. 수화기 너머 매니저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처에 협력병원이 있다고 하셨고 상호명을 몇 번이나 되뇐 후 그곳으로 향했다.

 집에서 7분 거리. 차는 길바닥에 버려두다시피 두고 다급하게 병원으로 들어서자 린지 보호자 님이시냐 묻는다. 기존 병원에서 그 사이 이곳으로 전화 주셨다는데 나는 그때부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2010년 9월 23일

   린지와 나는 인천의 한 애견샵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의 난 내 반려견 '보은이'를 잃어버린 상처가 아물기도 전이었는데, 사정을 지켜보던 친구가 나를 그곳에 데려간 것이다. 계획도 없이 간 애견샵에는 주먹만 한 하얀색 솜뭉치 같은 녀석들이 칸칸이 자리를 잡곤 옹알이를 하듯 온 몸으로 짖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 가장 잘 보이는 강아지 위주로 연신 설명을 하던 주인을 뒤로하곤 보은이에게 미안한 생각만 들어 구석 의자로 가서 앉았는데, 가장 구석 칸에 얌전히 앉아 짖지 않는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그대로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보았는데, 조막만 한 아이가 새까만 눈동자를 하곤 미동도 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바라보고 있었던 착각이 들 정도로.

 살다 보니 처음 만나는 사람 중에도 어쩐지 처음 만난 것 같지 않는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 작은 강아지가 분명 그랬다. 찰나의 눈 맞춤으로 우린 그렇게 가족이 될 운명이었는지.


  정해진 일인 듯 내 곁에 린지가 왔고, 몇 달 뒤 또 다른 운명의 장난처럼 식구가 된 루미와 함께, 우리 셋은 햇수로 12년째 함께이다. 그러니 어느새 우리는 차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짙고 깊은 애정으로 똘똘 뭉쳐 서로의 심장을 나눠가진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12년째 거의 매일의 아침은 녀석들의 아침인사로 행복의 축복을 누린다. 종이 다른 우리가 만나 서로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기적이 아닌 다른 어떤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녀석들로 인해 어느 틈엔가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는 나 밖에 모르던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되어있다. 이 녀석들과 가장 많이 나눈 세 문장이 우리의 기적을 만들어 준 말일지 모른다. 그러니 이 기적의 시간이 좀 더 오래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


  대기실에서 린지를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의 지난 시간을 회고할 만큼 길고도 짧았다. 엑스레이와 신경 검사를 마치고 만난 린지는 12년 전 그날처럼 새까만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병원으로 오는 동안 조금씩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검사상으론 큰 이상은 없다는 소견과 함께 한결 나은 회복을 보여주는 린지를 보니 그제야 내 '꼴'이 실감 났다. 남편 티셔츠 차림에 상의 속옷도 입지 않았고 지갑도 없다. 그제야 민망함을 느끼지만 이 녀석이 괜찮으니 나는 당연히도 괜찮다.


  린지는 선천성 뇌질환을 앓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사지마비로 경련을 몇 차례 보이고 있는 12살 노견의 길로 들어섰으니, 노브라에 만신창이로 뛰쳐나오는 일쯤은 어렵지 않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이 녀석만 괜찮을 수 있다면 나는 괜찮아야 한다.


  12년이면 사람이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시간. 내 나이 철부지 20대에 이 녀석들을 만났으니 처음의 몇 년은 나의 이기대로 녀석들을 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녀석들은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는 사랑만을 주는 것일까. 신께서 이기적인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 날개 없는 천사를 보내주신 걸까, 또는 신이 매 순간 함께 하실 수 없어 사랑 가득한 존재를 곁으로 보내주신 걸까.


  존재의 의미는 형상이 아닌 관계로 결정지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존재.  어떤 화려한 형용사도 필요치 않는 우리들의 관계. 영원을 빚을  있는 관계. 그럼에도 우리는 약속된 이별의 시간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그러니 유한한 시간 앞에 오늘도 우리 힘껏 사랑하자.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만큼 너희가 내게 가르쳐준 대로 끝까지 늘 항상 이처럼 사랑할게.



나의 작은 두 천사, 린지와 루미.

언제나 늘 고마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 다른 존재와 심장을 나누어 본 행운을 가진 분들께 오늘을 공감받고자 다소 두서없는 글을 남깁니다.

오늘도 함께여서 행복한 순간이시길 바라며

2021년 9월의 마지막 날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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