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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다리 Feb 16. 2020

돌산은 힘들어! 명성산 백패킹





처음부터 이곳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겨울이 되면 더 무거워지는 배낭의 무게를 감안해서 많이 힘들지 않고 적당히 운동이 되는 곳으로 가려했었다.


먼저 레이더에 감지된 곳은 각흘산. 

원적산과 같은 이유로 능선에 나무가 잘려 나가 황량하고 거친 느낌의 산.


 백패킹 갈 곳을 리스트에 올려놓고 한 곳 한 곳 직접 찾아가 보는 걸 난 좋아한다. 모니터로 후기만 봐오던 곳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단순한 행위 이건만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오늘도 위시 리스트 중 한 곳을 찾아간다는 사실에 룰루랄라 신나 하면서 차를 몰고 포천에서 철원 쪽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들머리에 도착하자마자 처참하게 무너졌다. 


들머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돼지열병 확산을 막기 위해 등산로를 폐쇄한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돼지열병이 대한민국에서 종식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포천과 철원 경계지역에 위치한 외진 이곳은 돼지열병을 차단하기 위해 여전히 멧돼지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과감하게 포기를 하고 대안으로 선택한 곳이 근처에 위치한 명성산. 

산정호수를 품고 있고, 가을이면 산 능선을 뒤덮는 억새로 유명한 곳이며, 궁예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산이라는 것 빼곤 명성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급하게 지도를 검색해 찾아간 들머리, 산안고개에서 바라본 명성산의 첫인상이다. 육산이 아닌 바위산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들머리 여기저기 보이는 군부대 훈련 진지에 더 눈이 쏠렸는지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계곡을 따라 나있는 등로에도 바위와 돌 투성이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돌부리와 바위를 밟고 지나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탄하지 않은 바닥과 불규칙한 보폭에 시간은 지체되고 다리는 점점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지만 산정산에서의 혹한을 대비하기 위해 챙긴 짐으로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오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각흘산을 들렀다 오느라 출발이 늦은 데다 산행 속도를 더디게 하는 무수한 돌부리들 때문에 삼분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벌써 해가 지려고 한다. 서산으로 떨어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늘도 초행길에 야등이구나'라는 생각에 불안한 한 숨을 내뱉는다. 






명성산의 팻말은 친절하지 않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어두워져 좁아진 시야와 고도가 높아질수록 급하지는 경사. 그리고 여전히 괴롭히는 돌과 바위들 때문에 산행속도는 느려질 만큼 느려진다. 속도가 느린 만큼 덜 힘들어야 하는데 숨이 차오르는 건 여전하고, 머릿속 계산으론 벌써 정상에 도착해야 하는데 줄곳 보이는 봉우리는 여전히 머리 위로 우뚝 솟아 있어 미칠 지경이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 하늘까지 연결되어 있을 것 같던 오르막길은 어느덧 끝이 나고, 덜 수고스러운 능선길을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산 위에서의 저녁 식사는 언제나 꿀맛이지만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 탓인지 평소보다 빨리 끝나고, 침낭 안에 지친 몸을 뉘이자마자 눈은 저절로 감기었다. 








인기척은커녕 새소리, 야생 동물의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새벽에 잠을 깼다. 

"샥  -   샥"

텐트 위로 무언가 내려앉으며 나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 

눈이 내려앉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집중해서 다시 들어봐도 눈이 내려앉는 소리가 분명했다. 주변이 워낙 조용해서 그 작은 소리가 텐트 안에선 제법 크게 들려왔다.

'눈이 많이 내리면 내일 귀갓길이 힘들 텐데 어쩌나'라는 생각을 하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말자 텐트 지퍼를 살짝 열고 밖을 내다봤다. 눈은 없었다. 

또렷이 기억이 나는 걸로 봐선 분명 꿈을 꾼 건 아니었다. 텐트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서자 새벽에 들려왔던 소리의 정체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상고대. 산 꼭대기에 머물던 수증기가 새벽 찬 기운에 얼어붙으면서 박지 주변 나무들을 모두 흰 옷으로 갈아입혔다. 동계 백패킹을 하면서 상고대 내려앉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또 다른 장관이 반대편으로 펼쳐진다. 산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운무 사이로 일출이 시작되었다.











산상 아침은 영하의 날씨지만 지난 번 능경봉 백패킹 때에 비하면 봄 날씨처럼 포근하다.

덕분에 의자에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는 잠깐의 여유도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내려가는 길에도 온통 상고대 세상이다.











어제 저녁 예상보다 늦어져 그냥 지나쳤던 정상을 들렀다 본격적으로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고개를 들 때마다 보이며 수 차례 절망에 빠뜨렸던 삼각봉이 하산할 때는 금세 나의 시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 P. S.]  사진 설명



 건너편 왼쪽 상단에 봉긋 솟은 산이 각흘산이다. 이번에 오르진 못했지만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평온해 보이는 이 곳이 바로 동양 최대 규모의 사격훈련장이라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이 사격장 덕분에 난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을 보냈지만, 사격으로 인한 굉음 때문인지 야생동물들의 흔적 찾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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