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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May 03. 2019

002 꽃의 눈물

Perez Cruz (CS 2014, Chile)


  

  눈이 시릴 만큼 향기가 곱던 칠레산 와인 Perez Cruz (Cabernet Sauvignon 2014, Chile)을 만났어요. 코르크를 벗겨 내면, 금방 꺾은 봄꽃과 같은 첫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그래서 바로 마시기보다는 그 향기를 제 마음껏 허공에 춤추게 놔두고, 잠시 기다려 줘야 하지요.


  첫 알코올 내음이 꽤 진하기 때문에, 성급히 마셔버리면, 이내 묵직하게 치고 올라오는 Cabernet Sauvignon의 숙성된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어서 빨리 한 모금하고 싶은 마음이 차오릅니다. 이미, 그 향기에 취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는 이 와인을 '예쁜 아가씨'에 비유하기도 했어요. 너무 예뻐서 눈이 부시면,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쁜 사람은 생각보다 쓸쓸한 존재에요. 그녀가 자라오면서 듣던, 셀 수도 없이 듣던, '예쁘다'는 말에는 성급하게 다가오는 상대방의 욕심이 배어있거나, 어떤 선입견들로 가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남녀를 떠나, 결국 '진짜'의 모습은 '시간'을 필요로 하니까요. 성급하지 않게 조심스럽지만 믿음을 주는, 그러한 '디캔팅'의 시간 혹은 아름답게 머뭇거릴 시간이 서로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와인을 한 잔을 따라두고, 잠시 시간을 두고자 했어요. '오늘의 날씨' 만큼이나, 뻔하지만 무난한 바텐더의 스타터(starter)로서, 빈티지에 관한 이야기로 잠깐의 적막을 시작했지요.


  와인의 빈티지를 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그 해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를 함께 돌이켜 보곤 하지요. 그리고 그 와인을 선택한 손님에게, 내가 모르는 '그 해'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즐거움도 있고요. 그러다가, 문득 서로가 말을 잇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이 있는데, 그게 하필이면 2014년이었습니다.


  '이 와인은 금세 피어난 봄 꽃 같아요. 기다렸다 드셔 보세요'

  '아.. 그렇군요. 향기가 참 좋네요'

  '빈티지가 2014년인데, 그 해 봄날이 기억나세요?'

  '네... 아마도'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그 해 봄날, 우리 모두가 잊지 못할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 버렸어요. 잠시, '아차!' 싶을 만큼 나의 몸이 굳어지게 만든 '세월호 침몰'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이었죠. 저는 그때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수많은 어린 고등학생들이 차가운 바다에 수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날 늦은 오후 무렵이었는데, 뉴스를 보다가 마침 먹었던 간식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한두 시간쯤은 책을 덮어두고 무작정 길거리를 배회했던 기억이 났어요. 너무 비현실적인 비극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의 나는, 그날 무엇을 더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거든요.



  





  엄청난 비극적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치유되면서도 다시 상처가 덧나고 더디게 가는 까닭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받는 상처들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받는 상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헤어질 수 ‘없는’ 관계들에게서 받는 서운함과 섭섭함. 그게 아니라면 헤어지기 싫어서, ‘딱 여기까지 못 보고 그만’ 일 것 같은, 아쉬운 사람이라서 더욱 뼈 아픈 서로의 사소함들. 거창하게 ‘상처’라고 부르기도 미미한 것들 때문에 (남들 보기에) 정신 멀쩡 한 내가 이렇게나 흔들리는 게, 남몰래 부끄러워지기도 해요.


  향기가 풍성한 와인들을 마주하면서,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 마냥, 우리는 기쁨만큼이나 서로의 슬픔에 대해서도 '머뭇거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이 든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낭만처럼 느껴질 스무 살의 이별이, 그 당시 여린 마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픈 독약처럼 쓰리지 않겠어요? 서로 만난 날이 겨우 닷새 정도밖에 안 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는, 가장 아픈 사랑이면서도, 머뭇거리고 기다리지 못한 ‘순수’에 관한 비극이지요. 마치, 우리가 젊은 날 한번쯤은 경험했을 광기의 기억처럼.


  그러니,  그 누구에게도 ‘그 슬픔을 어서 거두라’는 말은 쉽게 않아야 합니다.


  사실, 별거 아닌 게, 나한테 제일 아파요.



  




  기다려 줘야겠죠.  


  당신의 향기에 빠져들어, 흔들리는 사람에게나... 그의 무심함에 상처 받은 누군가에게나... 온전히 사랑을 준비할 시간 그리고 조금 더 용서할 시간, 서로의 마음을 열거나 혹은 닫아갈 시간. 그 시간을 기다려 줘야 하겠죠.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가혹한 '느림'인가요.


  Perez Cruz를 한 잔 따라두고, 그 고운 꽃향기를 피워두고, 기다리지 못한 오래된 마음에 관하여 그리고 기다려야 하는 고통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 봅니다. Maipo Valley에서 오래된 시간을 견뎌 낸 포도 알갱이들이, 어지러운 향기의 잔치를 끝내고, 빨간 무릎담요처럼 올라와 당신의 마른 입술까지 다정히 덮어 줄 것입니다.

  

  방금 널어 둔 봄날의 빨래와 같이, 누군가의 마음이 아직 젖어 있다면, 그 느린 걸음을 기다려 주세요. 흐르는 봄바람 속에, 다시 보송해질테니까.



  기다려 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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