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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May 18. 2019

007 타버리고 남은 것들

몽키 47 진


  

  보이지도 않는 것에 마음을 홀랑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언제나 킁킁거리며, 좋은 향기를 주워 담아보려고 했어요. 후각이라는 것은 말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고, 가장 떠올리기도 어려운 감각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의 향기 혹은 체취를 맡으면서, 그 사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죠.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변치 않을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도 않는 '향기'에 쉽게 흔들리는, 나약한 나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 술이 있습니다. 오늘은 독일에서 건너온 드라이 진, '몽키 47 (Monkey 47, Schwarzwald Dry Gin)'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코르크 마개를 열어주면, '몽키 47'의 향기가 울컥 쏟아집니다. '와! 이건 그냥 와!'라고 말할 수 밖에요. 비 온 후, 초록색 풀들이 뱉어내는 진한 향기가 나요. 이건, 제가 정말 좋아하는 향기 중의 하나입니다.


  그 향기에 취하다 보니,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근처에 있는 오래된 성당이 생각났어요. 비가 개인 날이면 저는 가끔 사무실을 혼자서 슬쩍 빠져나가, 성당 화단의 흙내음을 맡고 돌아오곤 했지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 깊으면서도 진한 풀향기와 달콤한 물맛. 살짝 비린듯한 빗방울의 상쾌함이 코끝에서 시작해서, 온몸으로 흘러넘치는 기분이 드니까요.


  그림으로 그려둘 수도 사진으로 찍어 둘 수도 없는, 만져볼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향기'라는 감각의 아름다움이죠.




  역시, 얼음을 한잔 담아줘야겠어요. '진 Gin'은 이렇게 마시는 겁니다. 얼음이 살살 녹으면, 점점 올라오는 향기를 물에 녹여서 음미할 수 있는 한편, 달아오르는 입술을 살짝 식혀줄 수 있으니까요. 물론, 레몬이나 ‘토닉 워터’와 함께 하는 것도 기가 막힌 궁합이죠. 하지만, 저는 '몽키 47'을 마실 때는 얼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습니다. 그 향기 만으로도 이미 완벽하니까요.  


  Petrichor. n. The dictinctive scent which accompanies the first rain after long warm day spell.


  Petrichor n. 비 온 뒤에 올라오는 흙냄새. 글쎄, 이런 영어 단어도 있더라고요. 사실, 1964년 식물을 연구하던 과학자 두 명이 만들어낸 단어라고 합니다. 아니,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좋아했을 '비 온 뒤에 올라오는 흙냄새'를 대표하는 단어가 그 이전에는 없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만일, Petrichor라는 단어를 딱 하나의 술잔에 이름 붙여야 한다면, 당연히 '몽키 47'의 향기입니다.



 





  '진 Gin' 은 도대체 무얼로 만들길래, 이렇게 투명한 빛으로 향기가 다양한 술이 많을까? 궁금한 적이 있었어요. 성분 만을 따지고 보자면, 기본적으로는 감자 등을 원료로 하는 보드카와 비슷합니다. 여기에 주니퍼 베리 (두송), 코리엔더, 월귤 등을 넣어 그 향기를 더한다고 하네요. '코리엔더?' 뭔가 ‘한쿡사람’ 같기도 하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서 찾아보니, '고수'라고 번역되더군요. 아, 내가 쌀국수 먹을 때 절대로 안 먹는 그 고수. (그런데, 진에 들어가면 왜 이렇게 향기롭지?)


  좋은 진은 찜통에 넣고 술을 증류시키면서, 그 증류 과정에서 앞서 말한 주니퍼 베리 등을 훈연한다고 해요. 술을 끓이고 슬쩍 약초의 향기를 가미하면서 다시 농축시키는 것이죠. 직접 집어넣고 우려내서 끓이는 방식도 있지만, 품질이 좋은 고급 진들은 이렇게 향기를 공기 중에 배어들게 하는 방식이랍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의 수증기 사이로, 약초의 잎줄기 위로 송송하게 돋아난 물방울이 맺히는 모습. 눈 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 같네요.


  그렇게 뜨겁고 오랜 기다림 끝에 얻어지는 진의 향기. 거르고 걸러서, 맺히고 스며들고 모여든 한 방울의 진. 무엇이 섞여 있는지 혀를 적셔 맛보기 전에는 짐직할 수 없을, 맑고 투명함.


  '몽키 47'은 긴 시간의 고독을 참고 기다리면서, 맑고 향기로운 영혼을 숙성시킨, 마흔일곱의 멋진 신사처럼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무작정 타오르기만 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의 나는 결코 '어린' 모습이 아니겠지만, 그래서 무작정 타오르는 사랑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사랑을 그리워하고 궁금해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막연히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리지 않지만,아직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향기로운 진을 삶아 내는 과정과 닮았어요. 무작정 마음을 흠뻑 담가서도 안되고, 오랜 시간 마음을 끓여내면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뜨거움을 식히고 되돌려, 물방울을 고이 모아 담고, 이를 다시 향기로운 것들 사이로 수증기를 쐬이면서 지친 시간들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 지루한 증류의 기다림과 인내의 훈연 과정을,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반복하는 것이죠.


  그래야 빛깔도 없고, 겉보기에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투명하고 맑은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보여야, '아무런 마음도 없는' 나이 든 사람이 되어야, 고운 향기를 남모르게 담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언젠가는 나의 '아무렇지도 않음'까지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기대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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