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KPGA챔피언십이 열리는 에이원CC
이 골프코스 설계자는 이 대회 제6회(1963년) 우승자 김학영 선생이다.
1999년 문 연 뒤로 이 골프장은 ‘10대 코스’니 ‘50대 코스’니 하는 ‘골프코스 랭킹’ 근처에 기웃거리지 않아왔다.
그러나 명백히 한국 탑클래스 코스다. “남쪽에 에이원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코스 · 이 대회의 백미는 (마지막 날)마지막 홀이다.
TV 중계에서 대표 화면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매우 아름다운 파4 홀이다. 보통 때는 14(서코스 5)번 홀로 운영되다가, KPGA챔피언십 대회에서는 후반 코스의 진행 순서를 바꿔 마지막 홀이 된다.
439야드로 (투어 선수들에겐)길지 않으나 양쪽의 커다란 호수가 장타자의 티샷을 끌어당긴다. 이 홀에서 마지막 날 드라이버로 통렬한 장타를 구사하다가, 다 잡은 듯하던 우승을 장렬하게 놓친 선수도 있었다(나는 그 선수 팬이다).
지금도 에이원의 상징 격인 이 홀은 더 상징적인 명물이 될 수도 있었다.
김학영 선생은 이 홀의 페어웨이를 섬(Island)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아일랜드 그린이 아니라 페어웨이가 아일랜드인 시그니처 파4 홀로 디자인했는데, 공사를 마무리 해나가던 때에 IMF 사태 등 어려움이 겹쳐 이 야심찬 디테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설계대로 아일랜드 페어웨이가 실현되었다면 더욱 짜릿하고 환상적인 홀이 되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군자리(능동)코스의 서울CC에서 연덕춘의 제자로 프로골퍼가 된 김학영은 제일모직 소속으로 고 이병철 회장의 지원을 받아 일찍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골프장들을 견학했다. 1960년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프로선수 생활을 하며 300야드 넘는 비거리의 장타자로 유명했으며, 한편으로는 골프장 설계·조성 회사에 다니며 코스 설계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익혔다.
1980년대 중반 경기도 안산의 제일CC를 시작으로 국내 골프장을 설계하기 시작하여 포천의 일동레이크(1996년), 제주도 테디밸리(2007년) 등의 골프코스들을 설계하고 직접 시공·감리했다.
에이원CC는 설계 예술가로서 그의 기술적 역량과 창의력이 무르익은 예순 살 전후의(1999년 개장) 야심작이다.
‘명문’ 또는 ‘명작’ 소리를 듣는 일동레이크, 테디밸리 등과 더불어, 에이원CC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되는 조형의 특징은 호수와 지면, 하늘이 만나 이루는 곡선이다.
일동레이크에서는 실개천이 아웃-인 코스를 연결하며 흐르다가 각 코스(마운틴코스, 힐코스) 7,8,9번을 우아한 곡선의 호수로 감싸며 마무리한다. 서귀포 테디밸리 12번, 13번 홀의 호수는 산방산의 그림자를 머금은 듯 신화적이다.
에이원CC의 호수들은 현대 건축·조형 예술 거장 알바 알토(Alvar Aalto, 1898~1976)의 ‘이딸라’ 화병을 떠올리게 하는 곡선미를 품고 있다. 알토는 조국 핀란드의 수많은 호수들에서 이 곡선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김학영의 이 곡선은 어디서 흘러와 이곳을 감돌고 있는지 흥미롭다. (골프코스 설계 거장 피트 다이 Pete Dye 설계 코스들의 침목 격벽이나 긴 벙커 등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의 고향 뚝섬에서 어린 시절 헤엄치고 뛰어놀았을 한강 광나루 백사장의 모습이 그 상상력의 원형 아니었을까 상상한다.
에이원의 코스 조형은 “버릴 것이 더 없고 채울 것도 더 이상 없다.”고 할 만큼 엄정하다. 마치 바우하우스(BAUHOUSE) - 디터 람스(Dieter Rams)- 애플 제품으로 이어지는 ‘기능미의 예술적 완성’ 디자인 흐름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멋을 내려는 장식이 앞서는 골프장들과는 다른 격이다.
호수의 곡선은 마운드와 벙커의 조형과 닮았다. 그린의 모양과 언듈레이션, 페어웨이(와 러프)의 선형과도 합을 이루며, 가깝고 먼 산 능선들과도 어울린다.
그린의 모양은 대체로 세 개의 타원이 융합한 아메바 모양을 띠면서 핀 위치마다 다른 공략 방법을 주문하는데, 깃대 꽂은 위치에 따라 최소한 세 개 이상의 그린을 바꿔 쓰는 효과를 낸다. 페어웨이의 각 구역도 그린콤플렉스의 유니트를 확대 적용한 모습이다.
따라서 티샷 할 때도 (그린의 핀 위치를 공략하듯) 과녁을 정하고 치라는 코스 설계다. 페어웨이의 어느 구역에 공이 놓이느냐에 따라 그린을 향하는 기술 샷과 전략이 완연히 다르다. 티샷, 어프로치, 그린 플레이가 각각 다른 미션과 드라마를 갖는다.
일반 골퍼와 상급자, 평범한 프로골퍼와 비범한 투어프로들이 각각 다른 전략으로 플레이할 수 있겠다.
그런 한편 코스가 플레이어들을 심하게 골탕 먹이지는 않는다. 샷 기술과 전략적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그 수행 능력 차이를 변별할 뿐이다. 투어프로 선수 출신의 설계자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플레이어들의 종합적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매 상황과 샷마다 가치를 부여하는 설계로 만든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기능성 또는 조형미로 나뉘어 겉돌지 않도록 ‘기능과 예술을 통합’해낸 완결성이 돋보인다.
이 코스에는 페어웨이에 배수구 맨홀이 거의 없다(정상적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는 곳에는 아예 없다). 김학영은 “페어웨이는 고속도로 같은 구역인데 맨홀이 있으면 잘못된 겁니다.”라고 말한다. 공사 내내 상주하며 허투루 만든 곳이 없도록 시공감리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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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GA챔피언십이 코스에서 7년째 열리고 있으며 2018년부터 작년까지 파70으로 대회를 치렀는데, 올해는 파71(7,048야드)로 구성했다. 상대적으로 짧아진 셈이다. 러프도 길지 않고 그린 스피드도 살이 떨릴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선수들 성적이 상대적으로 좋게 나올 듯하다.
일동레이크와 에이원CC는 같은 사람이 설계한 코스이기도 하고 ‘토너먼트 코스’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꼭 토너먼트 코스로 만든 것은 아니다. 골프장이 매우 부족한 편인 우리나라 (그것도 1990년대 만들어진) 부산·경남 지역 환경에서 토너먼트를 위한 절대 변별력 코스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토너먼트 용 구성이 얼마든지 가능한 코스를 만들었다”고 설계가는 말한다.
골프선수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키우기 전에 만든 코스이기에 요즘 남자 프로선수들의 메이저 대회를 치르기에는 코스의 전체 길이가(파 70으로 구성하더라도, 일부 벙커 장해물 들이 무력화되는 등) 다소 짧다고 분석할 수도 있으나 (챔피언티를 좀더 길게 설치할 수 있는 공간 여유도 있어 보인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힘보다는 전략과 기술을 중시하는 셋업이 가능한 코스다.
속속들이 골프의 재미가 숨어있는 이 코스는, 마스터스 같은 ‘명인열전’ 성격의 대회를 치르기 알맞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회 KPGA챔피언십을 후원하는 풍산그룹은 - 2015년 프레지던트컵 등을 실질적으로 유치하고 진행하는 등 - 한국 (남자프로)골프를 꾸준히 지원하면서도, 스스로를 앞에 내세우려 하지 않고 있다. 부산 경남지역 골프팬들이 KPGA 챔피언십 대회에 적극 참여하여 명예로운 유·무형 유산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길도 있지 않을까 혼자 상상해본다.
* 이 골프장 바로 곁에 ‘동부산CC'가 있다. 산하나 너머에 있는데 두 골프장의 성격이 독일과 프랑스의 차이에 견줄 만큼 서로 달라 보인다. 이 흥미로운 골프코스들을 [한국의골프장이야기] 넷째 권에서 함께 다루어 한 홀 한 홀 깊이 살펴보려 한다. 이 글은 대회 중계를 보다가 책 쓰기를 위해 적어두는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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