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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석무 Jul 06. 2024

라비에벨 올드코스 ‘인생의 아름다움’은 꿈속에 있는가

류석무의 한국 명작 골프장 해석(8)

<골프산업신문> 지면에 연재하는 골프코스 평론입니다. 한국골프장경영협회 창립 50주년 기념 ‘한국골프장총람’ 편찬을 총괄하느라, 지난 1년 간 연재를 쉬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의미있고 돋보이는 골프장들을 골라, 차례로 톺아봅니다. 



어릴 적에, 신석기 시대 애들과 다르지 않을 듯 놀았다. 들판을 떼 지어 쏘다니고 실개천 돌쩌귀를 헤쳤다, 발 닿는 곳마다 흙이고 짱돌이며 잡초였다. 손발은 무시로 흙투성이였다. 미루나무 줄지어 선 둑길 너머로 땅거미가 짙어올 때, 언덕에 올라 낙엽을 태우며 어둠과 함께 오는 별빛을 기다렸다.

21세기, 한국 아이들 절반 이상은 아파트가 고향이다. 공동주택 주거 비율이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이웃은 엘리베이터에서나 접하고, 학교와 학원으로 이어지는 육면체 벽 틀 안에서 앞다툼 한다. 삼사십 대나 오십 대 이상 늙어가는 이들도 닮아간다. 흙과 물과 숲에 목적 없이 몸을 맡겨 본 적이 언제였나. 


각진 벽 안에서 인생의 봄여름을 지낸 이들의 영혼은 메마르고 딱딱하다. 


골프의 사정은 다른가. (한국에서) 골프의 절반 이상은 육면체 방 안에서 사각형 스크린을 향해 공을 치는 게임이 차지한다. 실제 골프장에서도, 코스 정보 기록지 위에 플레이 과정을 적는 카드는 사라지고 결과 점수만 전자 기록으로 남는다. 그 ‘성적 내기 게임’을 골프라고 여기는 이가 점점 많아진다. 눈으로 보는 거리와 경사, 피부로 느끼는 바람과 대기의 감각을 스스로 버리고, 측정기 등의 ‘도움’이 골퍼의 ‘판단’을 대체해 간다. 


라비에벨 올드코스에서, 어린 날로 돌아가다. 

흙과 숲에서 멀어지며 소년은 늙었다. 별빛을 기다리며 틔웠던 영혼의 눈은 스무 살 이전에 닫혔다. 도회를 종횡하는 혼탁한 삶에서 우주의 암흑을 떠돌 듯 막막할 때면, 나는 어릴 적 개울을 건너던 몸 동작이나 맨발로 느끼던 흙의 온기, 숲에 감돌던 바람의 내음을 기도하듯 떠올리곤 했다. 그나마 자연과 마주하는 골프는 안식이자 도피처, 더러는 구원의 성소였다. 


이 골프장에서 처음 라운드하던, 여러 해 전 가을날이었다. 15번 파5 홀에 들어서면서 동반자들은 너나없이 깊은숨을 삼켰다. 홀을 감아 돌며 다랑논이 아득히 펼쳐지고, 그 안에 야생화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꽃 무리가 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였다. 페어웨이 옆, 다랑논은 파도 같고 만추의 화엽(花葉)은 물거품처럼 처연했다. 동반 플레이어가 ‘오비 구역을 뭐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냐’고 탄복하며 이죽거렸다. 나는 ‘꽃을 따서 첫사랑에게 다시 고백하고 싶은 곳’이라고 신파조로 어물거렸다가 주워 담았다. 다랑이를 휘감아 돌아 그린에 다가설수록,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느끼고픈 마음이 아우성쳤다. 논둑 사이 실개천에서 돌쩌귀를 헤치는 소년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첫사랑 따위를 알기도 전, 목적과 욕망에 휩쓸리기 이전의 시공간(時空間)에 돌아갔다 나온 듯 아득했다···



‘꿈속 마을’의 다랑논 - 시공을 뛰어넘는 다차원

라비에벨 올드코스의 조성 콘셉트는 ‘꿈속의 마을’이었다. 처음 계획할 때는 ‘무릉도원 프로젝트’로 불렸다. 골프 좋아하는 이들이 꿈속에 상상하는 이상향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15번부터 17번 홀까지 파5, 파4, 파3 홀은 다랑논 비탈을 휘감아 돌며 이어진다. 지금은 다랑논이 남해와 울릉도 섬마을에나 남아있지만, 사오십 년 전까지도 한국 땅 곳곳에 있었다. 산골 마을이 아니더라도 경사지에는 다랑이 형태의 논과 밭을 일궜다. 산업화 이전 시대를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한 이들이라면, 고향 또는 시골 마을의 기억 한구석에서 다랑논 비슷한 모양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랑이는 곡선·곡면으로 이루어진 다차원 조형이다. 비가 많이 오는 몬순 기후대 산악지형 농경 문화 지역에 필연적으로 형성되던 삶의 무늬다. 지구 반대편 유목 문화권 북해 링크스에서, 양을 치고 골프가 비롯됐던 것과 비견할 만한, 자연과 인간의 경계 지대 문양이다. 

인간이 새긴 문명 가운데 이처럼 애잔하게 자연에 기댄 조형이 다시 있을까. 3차원 공간이지만 여러 갈래의 입체를 포개고 접은 뒤 인간의 염원과 그들의 세월까지 켜켜이 압축해 놓은 듯한 초(超)고차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15번 홀 - 그 질문과 대답

다랑논이 펼쳐진 자리는 라비에벨 올드코스의 절정(Climax) 구간이다. 이곳의 다랑논 홀들을 어떻게 느끼셨는가.

15번 파5 홀(532m)은 여러 질문을 던진다. 

우선, 티샷부터 퍼팅까지 모든 샷마다 의미와 선택을 묻는다. 

다랑논 비탈을 왼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홀이라서, 블랙티에서 그린 중앙까지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리는 490미터쯤이다. 이 코스에서 열린 KPGA투어 대회에서 남자 프로 선수 장타자들은 투온에 도전했다. 티샷을 페어웨이 왼쪽으로 잘 보냈다면, 선수들은 롱아이언샷으로도 다랑이 오비 구역을 넘겨 그린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세컨드샷으로 그린에 도달한다 해도. 무슨 구질로 어느 지점에 어떤 리듬으로 떨구는지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발생한다. 

쓰리 온 공략을 선택한다 해도, 레이업샷을 그린 겨누듯 정확한 지점(가장 정교한 어프로치샷을 할 수 있는 자리)에 낙하시킬 필요가 있다. 이 코스의 그린은 (스핀 콘트롤 하기 좋은) 양잔디 페어웨이 코스로는 (서양의 토너먼트코스들보다) 큰 편이지만, 그린콤플렉스 언듈레이션 조형이 핀 위치 구역별로 공략 방법과 구질을 확연히 다르게 요구하도록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이 홀 그린은 전체 홀 중에서 다소 작다). 

롱게임부터 그린 주변 숏게임, 퍼팅게임까지 섬세한 선택과 수행 기량을 묻는 홀이다.



그런 한편, 선수들이 다랑논을 넘겨 도전했다기보다 코스가 선수들에게 도전해 온다고 하는 게 옳다. 장타자들의 세컨드샷 지점에서 보면, 다랑논의 파도 너머에 선명한 그린이 문을 절반쯤 열고 기다리듯 유혹한다. 다랑논의 중첩된 곡선·곡면들은 플레이어의 감각에 혼동과 착시를 일으킨다. 이 공간에 압축된 다차원 조형체가 끌어당기는 중력이 빛과 시간을 왜곡하는 듯 3차원 감각 질서를 무너뜨린다. 바람이 없어도 일렁이는 듯한 다랑논의 다층 곡선이 코스의 언듈레이션과 겹치며 파도처럼 경기 공간에 밀려든다. 


이 홀에서, 다랑논의 꽃잎 하나, 실개천의 돌멩이 하나까지 느낄 수도 있고 게임에 집중하느라 공과 목표지점만 보는 이도 있다. 누구에겐 십오 분쯤의 경기 공간이고 어느 골퍼에겐 몇 시간을 헤맨 듯한 미로이며, 또 다른 이는 웜홀을 지나듯 다른 시공간을 다녀온 몽환적 경험으로 기억할 수 있다. 이 홀에서 바람 속의 페어웨이와 다랑논을 걸어보는 사람,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처럼 노래를 부르며 가는 여자, 전동 카트를 타고 그린에 빨리 올라가 보는 골퍼, 오직 거리측정기만 믿고 치는 이, 그런 플레이가 인간이 스포츠에서조차 단말기의 연장으로 종속되는 짓이라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다.


한 홀에서도 저마다 다른 길을 간다. 다양한 질문을 깊이 있고 아름답게 던질수록 좋은 코스임은 분명하다. 그 속에서 서로 경쟁하는 듯하지만, 함께 자연과 맞서며 결국은 스스로의 길을 찾는 것.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의연히 설 수 있는 인간 – 그것을 이뤄가는 과정이 (골프라는) 스포츠다. 라비에벨 15번 홀의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답하는가. 


한옥마을 클럽하우스와 그 의미

18번 홀은 경기의 대단원을 장려하게 마감한다. 기능과 미관의 완성도가 높은 홀이지만 15, 16, 17번 다랑논의 ‘아름다운 혼돈’을 경험하고 난 뒤여서 자칫 평범해 보일 수 있는데, 이 홀을 바라보는 한옥 클럽하우스가 극적 ‘엔딩 씬’ 역할을 한다.

클럽하우스는 ‘한옥마을’ 개념으로 지었다. 나는 대하소설 「토지」의 최참판댁이나 강릉의 선교장처럼 지역 부호의 성채 급 대저택을 이 ‘무릉도원 마을’ 콘셉트에 들여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골프장 설계·조성자는 “한옥이 아니라 한옥마을입니다.”라고 강조했다.



클럽하우스 중에 봉건 시대 성채처럼 지은 게 많은 까닭은 봉건 영주의 ‘컨트리하우스’가 그 원형이기 때문이다. 영국 귀족들은 봉건 시대부터 세습된 지방 영지 저택을 ‘컨트리하우스라고 불렀다. 런던의 정치·업무 생활용 거주지인 ‘타운하우스’와 구별한 이름이다. 준 귀족인 ‘젠트리’와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가들도 귀족을 따라 컨트리하우스를 장만했다, 당시 런던의 ‘클럽’과 사교 모임들은 의회가 열리는 가을과 겨울에 제철을 맞았으며, 귀족·젠트리·자본가들은 이 시기에 타운하우스에서 머물며 업무와 교제 생활을 하다가, 사교 시즌이 끝나면 자기 영지의 컨트리하우스로 돌아갔다. 컨트리하우스는 파티를 여는 갤러리와 귀빈용 방들, 정원과 놀이 시설 등을 대개 갖췄다. 손님을 초대하여 환대하고 취미를 함께 즐기기 위함이었다. 업무가 없는 때에는 컨트리 하우스에서 사냥과 낚시 등 전원 속의 취미 스포츠와 독서를 즐기는 것이 젠틀맨의 전형적인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젠틀맨을 정신적 모범으로 삼는 훗날의 미국 상류사회에서 ‘컨트리클럽’이 퍼져나간 것은, 그 이름과 양식 등을 모방·조합했던 결과로 보인다. 


한옥이 아니라 ‘한옥마을’이라는 것은 컨트리하우스처럼 특별한 사람의 저택이 아니라 공동체 공간임을 뜻한다. 궁궐과 사찰 규모의 대형 건축물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위압감보다 편안한 느낌이 드는 까닭은 반가의 고택, 별서 누정 등의 특징을 골고루 적용한 건물 하나하나가 크기와 기능의 리듬을 유지하며 한 마을처럼 구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18번 홀에서 클럽하우스를 보며 돌아올 때, ‘영웅 귀환 서사’보다는 ‘모험 소년의 귀가’ 이야기가 느껴진다.



한국 산중에 어울린, 도전적 코스와 평안한 마을

골프장 영역 안에는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을 이루고자 한 문화적 공간과 장치·장식·조형들이 여러 곳에 보인다. 본디 깊은 산중이던 터를 활짝 핀 연꽃에 감싸인 모양으로 펴내면서, 엄청난 공력을 쏟아부어 자연과 인간의 경계 지대를 새로 창조해 냈다. 플레이와 관계없는 홀 사이에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 원림에서 가져온 듯한 누정을 세우기도 했고, 스타트하우스는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따온 듯 코스와 주변의 산수를 향해 열린 모양이다. 어쩌면 골프코스를 넘어 「토지」나 「도화원기」에 견줄 대하 서사와 시정(詩情)을 담아내려 한 작품일 수 있으니, 이 마을 이야기를 한 편의 지면 글에 압축할 수는 없다. 


다랑논 구간 말고도 거의 모든 홀들이 현실과 꿈의 경계에 놓인 듯 수려하면서, 골프코스로서의 탄탄한 본질적 완성도를 품고 있다.

5번 파5 홀은 삼십여 개의 벙커와 숲 사이를 헤치고 올라 고지 위의 그린을 공략하고, 6번 파4 홀은 비탈 지형에 두 갈래 페어웨이를 조성해 플레이어의 전략적 선택을 묻는다. 한국 산야의 특질을 골프코스의 기능 특성과 심미적 개성으로 살려낸 홀들이다. 



8번 파4 홀은 거대한 거북(玄武) 모양 노두(露頭)와 정면으로 맞선다. 산에 묻혀있다가 코스를 조성할 때 드러난 초대형 바위다.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암반이다. 양택(陽宅)의 풍수(風水) 관점에서는 바위 모양이 거칠다고 얘기할 수 있겠으나, 자연과 대결하는 골프코스에서 강렬한 도전감을 불러일으키는 조형 요소로 적극 활용했다. 이 홀 아래 한옥마을 클럽하우스 뒤편의 소나무숲을 더 풍성히 가꿔 노두의 예기를 부드럽게 받아낸다면, 마을은 한결 평안해지고 코스의 조경 균형도 더 살아나리라 생각한다.



세상에 하나뿐

골프코스 조성 전문가 안문환이 최고급 회원제 클럽으로 개발하다가, 코오롱이 인수하여 2015년 대중형 골프장으로 개장했다. 코오롱은 라비에벨 단지에 깊은 공을 들였다. 고속도로 남춘천IC에서 나와 라비에벨로 들어오는 ‘종자터널’을 직접 만들었다. 이 터널을 지나면 바로 듄스코스가 나오고 우측으로 작은 터널을 지나면 올드코스가 무릉도원처럼 펼쳐진다.


“에르메스처럼 마케팅할 수도 있는 골프장인데요······”


라비에벨과 우정힐스 경영을 맡고 있는 이정윤 대표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이토록 공들인 골프장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운영하는 데 대한 고마움을 담은 인사였다. 우정힐스를 가꿔온 데서 보여주듯이, 코스의 본질을 살려내는 데 우직하고 충실한 코오롱이다. 

‘세상에 하나뿐’이랄 만한 자산들을 이 코스는 품고 있다. ‘명문’이라 불리는 여느 골프장들에서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시간이 흐르며, 세상이 그 가치를 점점 더 알아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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