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지 연습장

by 윈서

칠순이 넘은 엄마의 애착 물건은 내가 만든 이면지 연습장이다.

어느 한가한 일요일 아침,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진풍명품쇼를 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유리문이달린 오래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먼지를 뒤집어쓴 A4 종이 뭉치들이더블클립이나 고무줄에 묶여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버리기는 서운하고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추려서 모아놓았던 것들이었다.


밥을 먹다 말고 전부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보니 내용은 필요가 없어졌는데 종이 상태는 꽤 좋았다.

끝 부분이 누렇게 변한 것도 있었지만 구겨지지 않고 제법 반듯해서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생각하다가 일부는 버리고 상태 좋은 것들만 정리해서 다음날 회사 근처 문방구에 맡겨 스프링 제본을 맡겼다. 표지는 아무거나 넣어달라고 부탁했더니 반들반들하고 두꺼운 종이를 묶어 주셨다.


뒷면이 인쇄된 이면지이긴 해도 빳빳한 표지가 달린 연습장은 엄마를 기쁘게 했다.

"어머, 너무 좋다. 버리는 종이로 이렇게도 만들 수 있어? 세상에 신기하네에."

표지를 넘겨 줄이 없는 하얀 종이를 손으로 쓸어 보시더니 금방 책가방에서 영어책을 꺼내 단어를 쓰기

시작하셨다. 돋보기는 언제 쓰셨는지 나이 든 어른의 손은 필요한 때에 순발력을 발휘한다.

"엄마, 나중에 써. TV 보다 말고 공부한다고?"

"그래도 새건대 글씨를 써봐야지 서운하잖아."


고딩 손자가 할머니 공부 하신다고 4줄 영어 노트며 연필, 지우개 등을 잔뜩 사서 서랍에 넣어 두었다.

물론 진짜 연습장도 있었다.

내가 만든 것과 달리 앞뒤가 깨끗한 갱지 연습장이다.

그렇지만 화장실 가다가도 슬쩍 열어보고 뿌듯한 눈인사를 할 뿐 그 서랍은 비밀창고 내지는 1인용 금고 정도로 사용하실 모양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저녁에 문단속을 하고 거실 불을 끄려는데 엄마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열린 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구부정하게 앉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

"엄마, 아직도 공부해? 주무셔야지."

"어? 이제 잘 거야. 너도 어서 자, 내일 출근해야지."

"네, 얼른 주무세요."


새벽에 잠이 깼는데 노트가 생각났다. 영어는 잘하고 계신 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엄마가 깨시지 않도록 살며시 들어가 노트를 가지고 나왔다.


'맙소사!'

내가 만들어 드린 이면지 노트가 너덜너덜 고시생 노트를 보는 것 같았다. 한쪽이 눌리고 접히고 국물이 흘렀는지 얼룩도 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페이지를 넘기니 폐기 직전이었던 이면지 위에 형형색색 문자들이 춤을 추는가 싶더니 삐뚤빼뚤 알파벳이 여기저기 추상화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코끝이 찡했다.

어떤 페이지는 이면지뿐만 아니라 인쇄된 면의 상하좌우 여백에도 빼곡히 채워져 있었는데 직선,

사선 그리고 삐뚤빼뚤 곡선은 말할 것도 없고 굵기도 다양했다.

손에 잡히는 필기도구는 다 쓰신 모양이었다.


w는 낯선 글자라서 선이 많이 흔들렸고 q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s는 당당하고 o는 너무 쉽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종이 한 장 더 넘기니 apple, map, kite, smoke, chair 등등 오래전 배웠던 단어들도 잊지 않고 복습을 하고 계셨다.

나이 70이 넘어 파닉스를 배우시다니 그 자체로 나에겐 당신이 이제는 편안하고 살만한 시간들을 보내고 계심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엄마가 열심히 영어 단어를 쓰고 계셨다.

"엄마 뭐 해?"

"어? 잊어버릴까 봐."

"아니 근데 왜 영수증 뒷면에 써?"

"아깝잖아."


세상에, 영수증, 청구서 뒷면, 심지어 길거리에서 받은 전단지 여백에도 빼곡히 단어들을 채우고 계셨나 보다. 벽을 보니 지난 달력 위에도 구불텅구불텅 알파벳과 단어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아니 애들도 아니고 온천지에'

눈에 보이는 종이 쪼가리들이 모두 연습장으로 변해서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엄마, 연습장 있잖아요. 왜 이런데 전부 써놨어."


설명은 이랬다.

일단 영어 연습을 할 때는 자투리 종이들이 보이는 대로 앞뒤에 영어 단어들을 쓴다. 그것들이 다 채워지면 내가 만들어 드린 이면지 연습장에 쓰고 그곳을 지나온 단어는 손자가 사준 갱지 연습장에 잠시 들른 뒤 최종적으로 4선으로 된 영어노트에 안착하는 것이다.


"무슨 단어 하나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써?"

내가 웃어 죽겠다며 엄마를 보고 있으니

언제나 그 표정 '쟤는 물건 아까운 줄 몰라.'

딱 그 얼굴로 나를 바라보신다.



그날 밤 다시 엄마의 방으로 잠입했다.

제법 두껍게 만들어 드린 연습장은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데다 여기저기 접히고 찢어지고 드문드문 얼룩도 보여서 당장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이면지를 모아야 하나 예쁜 것을 사야 하나 궁리를 하다가 주말에 책장을 탈탈 털어보기로 했다.

막연히 내가 만든 것은 비밀 창고에 있는 갱지로 된 연습장 보다 좋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옆에 끼고 만지고 넘기고 찾는 것이어야 한다.


이면지 연습장이 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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