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보다 곱다
화요일 오후 4시, 큰 이모를 만나고 온 엄마가 가방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셨다. 용돈이겠지 생각하고 무심하게 꺼낸 5만원권 위에 뜻밖에 붙어 있는 노란 포스트잇, 이리저리 나부끼는 치맛자락 같은 글씨가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칠순 축하, 세월이 이렇게 많이 많이 왔네. 이제 3년 있으면 또 하나 남았네?"
엄마는 파닉스 영어교실이 끝나고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신목동역에 간다고 하셨다.
지난 일요일 자식들 편의를 위해 미리 생신상을 받으셨는데 생신 당일에는 자매끼리 만나 식사를 하기로 약속하신 모양이었다.
왁자지껄 시끄럽고 유쾌하게 보내야 하는 날임에도 코로나 때문에 그러지 못해서 준비하는 나로서는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엄마는 일상적인 축하와 인사가 더 따듯하다며 오랜만에 큰 이모와 오붓하게 식사를 하게 되었으니 괜찮다고 오히려 위로하셨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 한창일 때 태어나서 평생 움츠리고 살았노라>는 대상 없는 타박도 없으시니 아마 나이 듦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신 모양이다.
어쨌든 사촌 남동생이 두 자매를 모시고 한식당에 가려고 기다린다는 연락을 받고 생일상 에피소드를 작은 배낭에 잔뜩 넣은 채 지하철을 타셨다.
"어머, 나 이모 글씨 처음 봐."
"나도 처음이야, 세상에 언니한테 편지를 다 받아보고 이게 웬일이니."
굳이 표현하자면 엄마는 추위에 약한 장군이고 큰 이모는 나약한 선비 스타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부딪치기도 하는데 서로 생각이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옆에서 보기에 걱정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마무리는 언제나 큰 이모가 조용히 "그래, 알았다."로 일단락 지으시고 엄마도 두 번 다시 같은 주장을 반복하지 않으셨다.
사실 겉으로 보면 엄마가 이긴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큰 이모는 품이 커서 '네가 그럴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태도였는데 정작 엄마는 당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나 혼자 조용히 웃을 때가 있다.
지켜보는 제삼자의 소소한 재미랄까, 나만 읽을 수 있는 두 분의 공기는 어쩌면 특혜 일지 모르겠다.
두 분의 엄마인 내 외할머니는 잘 먹고 잘 살라고 큰 이모를 재봉틀 집 양녀로 보내셨다고 한다.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나이였는데 양모가 주는 누룽지를 모았다가 외할머니 끓여 드시라고 들고 왔다니 심성은 정말 고우셨다. 원망 대신 누룽지라니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엄마와 막내 이모는 함께 자라지 않아 살가운 정이 없는데도 큰 이모는 늘 두 동생을 지켜보고 사셨다. 양녀로 간 집도 나중에 곤궁해져서 학교를 그만두고 시집도 일찍 갔지만 때가 되면 집안을 살피러 와서 모두들 잘 있는지 확인하고 조용히 가셨다고 한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언니 글씨를 본 적이 없어."
물끄러미 포스트잇을 바라보는 엄마의 등이 굽었다.
이제 3년 있으면 또 하나 남았네?"는 막내 이모를 두고 하신 말이다. 세 자매는 각각 3살 터울인데 6살 차이가 나는 큰 이모와 막내 이모는 둘째인 엄마보다 더 소원한 관계이다. 넉넉한 살림이든 그렇지 않든 막내는 어디서나 막내 티가 난다. 셋 중에 유독 톡톡 쏘는 갓김치 같은 막내 이모는 느리고 말없고... 힘없는 큰 이모를 썩 좋아하지 않으신 모양이다.
가운데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그렇듯 징검다리 역할이 소명인가 보다. 서로의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각자 만나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셋이 만날 자리를 만드는 것도 엄마의 역할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엄마 형제들의 <작은 우체통>이 되었다.
"이제 3년 있으면 또 하나 남았네?"
언제나 그렇듯 조금 먼 곳에서 제일 끝에 오는 막내를 지켜보고 계셨구나.
'우리 큰 이모 참 아름다운 분이다.'
최근 들어 엄마는 부쩍 말씀이 적어지셨다. 부딪치기보다는 침묵하고 이러저러한 소식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한마디 하는 것으로 대신하신다. 가능하면 상대가 옳다고 해주고 집안일은 더 꼼꼼히 살피신다. 마치 도심에서 <자연인>처럼 천천히, 조용히 살기로 결심하신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무리 백세 시대라도 그 과정을 빼먹을 수 없을 텐데 어떤 마음인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글과 말로 표현된다고 해서 그것이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엄마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계실 것 같다.
'그래, 이게 나이 든다는 거구나, 이렇게 나이 드는 거야.'
나는 그저 그 시간을 지켜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