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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실버라이프
엄마의 영어공부
by
윈서
Jan 6. 2022
2021년 12월에 내가 살고 있는 지역 내 여성문화센터에서 내년 1분기 문화강좌가 개설된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3개월 단위로 수강신청을 할 수 있는데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질 좋고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지역 주민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높다.
엄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영어과목을 신청해 달라고, 잊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평소와 다르게 강조하시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엄마의 노년생활에는 <학습>이 상당히
중요해질
모양이다.
오늘 첫 수업을 다녀오셔서 기분 좋게 앉아계신 모습을 보니 2년 전 일이 떠올랐다.
작은 이모와 함께 7박 9일 동안 동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날 엄마가 갑자기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다.
"나도 영어 배우고 싶어, 가이드가 어찌나 영어를 잘하고 똑똑한지 모르는 게 없더라고"
"모르는 게 없는 거랑 영어랑 무슨 상관이래"
"물건 사는 것도 도와주고 관광지에서 안내도 하고 호텔에서도 그랬어, 다 영어 잘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핸드폰 사진을 톡으로 보내는 것도 어렵고 상점에서 계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우물쭈물했어."
아뿔싸! 일행이 있었지만, 한두 번 자존심이 상하면 더 이상 묻지 않는 성격 탓에 여기저기서 많이 망설이고 걱정하셨나 보다. 여권을 보니 커버 안쪽에 제대로 쓰지 못한 <여행자 휴대품 신고서>가 아무렇게나 끼워져 있었는데 꼭 써야 하는 줄 알고 고민하셨던 것 같다.
"신고할 물건 없으면 필요 없는데, 모르면 가이드나 옆사람한테 물어보면 되지, 결국 제출도 안 했으면서..."
말끝이 흐려졌다.
"야, 나 그거 나 혼자 다 썼어, 그런 거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뭐가 어렵냐?"
"그래? 와, 그래도 엄마 용감하네 역시 엄 여사 쏴라있네!!"
"빈칸이 잘못했지 엄마가 잘못했나? 까짓 거 다음엔 나랑 가자." 이렇게 말하고는 9일간 마음속에 서러움과 부끄러움을 감춰두셨을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아릿했다.
"엄마, 학습지 영어 해보고 싶지 않아? 영어 공부하고 싶다고 했잖아." 며칠 후 나는 TV를 보고 계신 엄마에게 가볍게 툭 한마디 던졌다.
"그래, 알았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을 하신다.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건 나였다.
즉각적인 반응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나, 알파벳은 알아, 전에 네가 가르쳐 준거 몇 개는 기억할 수 있어." 라며 눈은 TV 드라마에 고정한 채 독백처럼 얘기하신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여행을 한창 다닐 때였을 것이다. 서운해하는 엄마에게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자고
며칠 동안 알파벳을 알려드렸었다.
"아, 맞다 그랬지? 그때 배웠으니까 지금은 조금만 해보면 기억날 거야."
용기를 북돋아 드리기 위해 나는 이런저런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영어가 배우기 어렵지 않다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 엄마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도 할 수 있어."
"......"
"알겠어요, 내가 당장 학습지 알아보고 다음 주부터 선생님 만날 수 있도록 할게요."
읽을 줄 안다면 길거리 간판을 보는 것도 가능하니 엄마로서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반만 이해하고 살아오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학습지 결정했어요. 나중에 두말하기 없기다."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일부러 강조하며 말을 했다.
"나도 한다면 한다. 너는 모를 거야, 내가 공부를 한창 열심히 할 때 할머니가 못하게 해서 이렇게 됐지
만약에 계속 공부시켰으면 지금의 내가 아닐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그걸 보여주시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 방문교사가 와서 겨우 10분 정도 진행되는 수업이 정말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시작은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처음 집으로 방문하시는 날,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집안 청소를 하면서 보일 듯 말 듯 거울에 자신을 슬쩍슬쩍
비추어 보셨다.
엄마의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속으로는 놀랐지만 호들갑 떨 수는 없었다.
그저 진즉에 배움의 기회를 만들었어야 했다는 자책이 들어서 속상했다.
드디어 현관 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OOO입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엄마는 수줍은 여학생이 되어 있었다.
"따라 해 보세요 어머니 A, A로 시작하는 단어는 Apple"
"에이, 애플, 애플, 애플... "
"잘하시네요."
그렇게 7개월을 배웠고 그 후 2년이 지났다.
"엄마 오늘 재미있었어요? 엄마 연배 비슷한 분들 많이 오셨지? 같이 수업 끝나고 커피숍도 가고
다른 과목도 수강하면 좋겠다."
"아니 많지는 않아. 어린애도 있고 손자랑 같이 공부하는 할머니도 있어."
"오~ 잘됐네, 친구 하면 되시겠어요."
"글쎄 모르지."
수제비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하는 것처럼 나의 질문에 집중하고 정성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엄마의 마음에 기대와 희망이라는 <심>이 제대로 박혀버린 것 같다.
사실 당신의 길 뒤에 서 있는 딸로서, 그 길이 곧 내가 걷게 될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분한 마음으로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볼 때가 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우울하고 슬픈
노년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쩌면 순탄하지 않았던 당신의 인생이 있었기에 오히려 지금이
반전의 기회일지 모른다
.
가보지 않은 길을 어떻게 다 짐작할 수 있겠는가. 단지 내가 가야 할 길이고,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이기에 아름답고 의미 있게 꾸며드리고 싶
을 뿐이다.
'내일도 열심히 영어공부 도와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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