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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실버라이프
엄마와 개명
언젠가는 내가 사는 별도 선택할 거야.
by
윈서
Dec 31. 2021
몇 해 전이었다.
당시 독립해 살고 있던 내게 늦은 밤 전화가 걸려왔다. 사촌오빠한테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하시려나 생각했는데 뜻밖에 엄마가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다.
"00야, 나 이름 바꾸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
"이름? 갑자기 왜?"
"아니, 전부터 바꾸고 싶었는데, 니들이 이 나이에 개명이 뭔 소용이냐고 타박할까 봐 말을 안 했었어."
"그랬었어? 아니 그게 뭐라고 엄마, 바꿔 괜찮아."
"정말? 난 네가 화낼까 봐 엄청 떨었어. 흑,,," 코가 매우신지 엄마 목소리가 찌그러지게 들렸다.
물론 알고 있었다. 엄마 이름은 어색한건 둘째치고 발음
도 어려워서 누가 물으면 기본적으로 네다섯 번을
반복해야 하고 그럴 때마다 재차 물어보는 상대방을 보며 부끄러워하셨다.
옛날에는 출생 신고할 때 이름 틀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고, 음은 같아도 한문이 다르거나 아예 처음부터
엉뚱한 이름이 되기도 해서 여자 이름은 미자 숙자 말자가 흔했다고 하셨다.
"차라리 미자 말자가 더 낫지만 말이야."
우리 형제가 엄마 이름이 이상하다고 놀린 적도 없는데 언제나 당신이 먼저 변명을 장황하게 해서 질문할
틈을 막아버리셨다.
나는 그냥 먹고 싶은 음식 대신 침을 꿀떡 삼키며 하셨던 엄마들만의 변명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상투적인 슬픈 거짓말 "나는 그거 싫어해, 너희들이나 먹어." 말이다.
가슴이 뜨겁게 뭉치는가 싶더니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부끄러움이
후회와 함께 밀려왔다.
"엄마, 난 당연히 괜찮지. 요즘에는 이름 바꾸는 건 일도 아니야. 주민등록번호도 바꿀 수 있고 이민 가면
국적도 바꾸는데 이름이 뭐가 대수라고, 걱정 말고 바꾸세요."
"그렇치이? 나 너무너무 너어~무 바꾸고 싶었어."
"그럼요. 이다음 세대들은 화성에서 살까, 지구에서 살까 그럴지도 몰라. 자기가 사는 별도 바꿀 수 있는
날이 올 텐데 뭐."
신이 난 엄마가 미리 받아놓은 이름 몇 개를 불러주셨다.
(아, 엄마는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하하하)
결국 서류 접수는 하지 못했다.
법무사에게 가는 날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며 그 비용으로 맛있는 거나 사 먹자고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마음이 정말 무거웠다.
안방마님인 나랑 다르게 엄마는 극 외향적이시다. 주중, 주말 상관없이 5시에 일어나 30분 정도의 기도가
끝나면 저녁상 같은 아침을 준비해 두고 빨래며 청소를 하신다. 딸이 빨리 일어나야 같이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러 나갈 수 있을 텐데, 주말이라 늦게 일어나는 날이면 답답한 마음에 방 앞에서 자꾸만 빗자루질을 해서 거슬리는 소리를 만드신다. 가끔은 그 소리 때문에 둘이 신경전이 벌어지는 날도 있다.
눈을 반쯤 뜨고 밥을 먹는데 엄마도 핸드폰을 들고 계속 다른 사람들과 통화를 시도하는 눈치다.
표정을 보니 친구분들 모두 바쁘신 모양이다.
'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오늘은 연휴 첫날이고, 아침밥을 먹고 나서 의무감에 사로잡힌 나는 화분을 정리하고 계신 엄마를 재촉했다.
"엄마 손 씻고 빨리 옷 입어요, 우리 바다 보러 가자."
"어? 갑자기 웬 바다"
잠깐 눈치를 살피더니 "나야 좋지 뭐어." 라며 서둘러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혹시 그새 내 맘이 변할까 봐 티셔츠와 바지를 거의 동시에 입다가 중심을 잃고 소파에 쿵하고 넘어지셨다.
"엄마, 천천히 해에, 아직 아침 9시라고."
"빨리 가야 오래 돌아다니지."
하아, 역시 에너자이저 우리 엄마다운 대답이다.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10분 후에 출발하는 강릉행 버스 좌석 두 개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표를 사서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바다라면 지하철로 인천에 가서 먼발치에서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웬일로 강원도 바다를 가는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버스가 한 시간쯤 달렸을까 엄마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나는 주위 승객들 눈치를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작 엄마 친구분 목소리가 정말 우렁찼다.
"000여사, 커피 한잔 합시다!"
"아이고, 진작 전화하지, 나 지금 큰딸이랑 바다 보러 동해에 가요오. 하하하"
"그래요? 난 아까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지."
엄마는 괜스레 안타깝다며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시는 중이다.
'000여사라고? 엄마 이름은 아니긴한
데
들어본 것 같기는 하고,,, 어디지?
아뿔싸
개명한다고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 중 하나였는데, 그걸 엄마 친구가 어떻게 알.......
세상에나 하하하하하! 역시 우리 엄마 계획이 있었어.'
나는 새어 나온 웃음에 엄마가 민망해할까 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엄마의 이중생활?' 마음속으로 시원하게 웃었다.
바다는 역시 강릉이다. 푸르고 짙푸르고 거칠고 빠르게 달려오는 파도는 갓 십 대 같기도 하고 이제 막 군대
에서 제대한 20대 사내 같기도 하다.
엄마는 바다와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벅차신
지 커플들이 좋아하는 흔들 벤치로 가서 앉으며 말씀하셨다.
"참 좋다. 고맙다."
엄마의 눈은 저 멀리 수평선 깊은 곳에 박히고 있었다.
'000여사로 더 오래 재미있게 사셨으면 좋겠는데, 걱정 마세요 천년만년 우리들과 살 거니까.'
몸을 굽혀 엄마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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