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봄 공연이 끝나고 두어 달 후, J의 싸이월드에 가서 사과문을 남겼다. 사실 먼저 거하게 당한 건 나였지만 그럼에도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나라고 잘한 것도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그냥 풀어내고 싶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앙금이 풀렸던 건지 J도 자기도 미안했다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인문대 쪽 수업을 갈 때마다 혹시나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이럴 거면 왜 먼저 손을 내밀었을까? 지금 돌아봐도 옹졸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한잔 하면서 풀었으면 더 나았을 텐데.
그 이후로 입대하기 전까지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신입 배우들은 들어오지 않아 04학번인 나와 동기들이 막내였고, 간혹 인문대 친구들이 일회성으로 극회 행사에 참가하긴 했지만 그것이 동아리 가입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불경기와 취업난의 여파이기도 했을 것이고, 인문대 자체에서 매 년 진행하던 '외국어 연극제'의 영향으로 연극 꿈나무들이 동아리보다는 소속 단과대의 외국어 연극에 참여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운 좋게 카투사로 복무한 탓에 주말에 외박을 자주 나왔고 가끔씩 연극부 소식을 전해 들었다. 07년 가을에 신입 단원들과 공연을 준비했지만 공연 팀 내부의 갈등으로 불과 개막 1주일 전 취소되었다는 이야기, 인문대학 건물 리모델링으로 인해 동아리방을 빼앗겼다는 이야기 등등. 동아리 사용 신청서만 제때 제출했으면 됐을 일이지만, 그 당시 극회는 사실상 활동 정지 상태여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기에 리모델링 이후 인문극회엔 동아리 방이 주어지지 않았다. 동아리방에 있었던 오디오, 대본, 포스터, 책, 사진첩 등의 귀중한 자료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도 없다. 국방의 의무로 자리를 비운 사이, 내 대학생활의 중심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돌이켜 보면 2004년 여름부터 2006년 여름까지의 만 2년은 내 삶에서 단연코 가장 충만한 순간이었다. 즐겁고, 괴롭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치열하게 꽉 차 있던 기억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고, 단단한 나를 돌아보고 깨뜨렸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가는 즐거움을 알아가면서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갔었던.
그때는 다시 오지 않을 내 '마법의 가을'이었을지도 모른다.
짧은 가을 동안, 낙엽이 대지를 덮기 시작하고 마침내 첫눈이 오게 될 때까지, 그 사람은 평생에 기억될 단 한 번의 가을을 가지게 되지. 때론 모를 수도 있어. 그저 그 가을에 일어났던 일만 기억하다가 몇 년 후에나, 혹은 늙어버렸을 때 겨우 알아차리게 되지. 하지만 자신이 마력의 시간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낙엽이 대지를 덮을 때부터 첫눈이 오기까지 놀라운 일을 이룩할 수 있지. (Dragon Raja, 이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