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1분기를 견뎌내고 마침내 3월 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갈등과 고민이 쌓이다 못해 미국 생활과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며 너무도 괴롭던 찰나, 감사히도 새로운 곳에서 기회가 열렸고 Offer Letter (미국 기업이 고용을 제안하는 서류)에 사인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유달리도 어렵던 이번 구직 과정 내내 '이직이 잘 되어 좋은 소식을 들고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기를' 얼마나 절절히 되풀이해 기도했던지...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서인지 16시간에 달하는 이코노미 비행조차 수월했다.
2주도 안 되는 시간은 눈 깜빡하는 사이에 지나갔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별로 잡지 않고 가족과의 시간에 집중했는데도 떠날 때는 언제나 그렇듯 아쉬움이 가득. 그래도 이번 방문으로 어머니와 장모님의 칠순을 얼굴을 보며 축하할 수 있었기에 후회는 조금도 없다. 특히 어머니와의 호캉스를 준비하면서 호텔 측에 사연을 설명했더니 케이크, 와인과 함께 유리창에 축하 메시지를 남겨준 덕분에 평생 남을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해외에 있어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불효를 이렇게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어 감사할 뿐.
이번 4월은 와이프의 40번째 생일이 있는 달이다. 미국에서는 40번째 생일을 크게 축하하는 것이 보통이기에, 나도 고민고민 끝에 남태평양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유명 관광지인 보라보라 여행을 선물로 준비했다. 당연히 비행기와 호텔 예약을 하던 23년 중반엔 이직 + 한국 방문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이직이 정해지고 나서 미국 => 보라보라 비행기를 취소한 후 미국 => 한국 + 한국 => 보라보라로 비행편 예약을 바꾸느라 고생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한국행 통보에 생일 직전 2주 가까이 독박 육아를 한 와이프도 고생이지만, 나는 고작 3주 동안 15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을 몇 번을 해야 하는 건지... 사서 하는 고생이라 할 말은 없지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장시간의 비행으로 지쳤던 몸과 마음은 보라보라 섬 상공을 지나는 순간 경이와 환희로 가득 찼다. '파랑'이라는 한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변주의 아름다운 바다, 유리처럼 투명한 바닷물과 그 속에서 노니는 수십수백의 물고기, 남국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기화요초들... 해가 지는 풍경의 비현실적 아름다움에 '내가 과연 현실에 있는 건가' 되묻기도 여러 번이었다. 기대가 크면 보통 실망도 큰 법인데, 보라보라는 얼마 안 되는 예외로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원래 바다와 모래사장을 좋아하는 태민이지만, 유달리도 이번 여행에서는 더 즐겁게 노는 모습에 흐뭇한 웃음을 짓기도 여러 번이었다. 오늘 오후, 해수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앞서 가는 아이에게서 들려오던 익숙한 노래 'In Summer'의 한 구절.
벌이 날고 민들레 홀씨 날리면
눈사람 여름을 나는 법 보여줄 거야
손에는 음료수
나 백사장 위에 누워서
선탠 한 번 제대로 해볼 거야
뜨거운 여름 바람이 겨울 몰아낼 거야
난 더우면 얼음이 어떻게 되는지 볼 거야
정말 난 궁금해 우리 친구들 생각이
정말 멋질 거야 여름날 눈사람
https://youtu.be/jssDOyZeZbM?si=W_DYwbCzB6JTacsW&t=10
요새 디즈니의 '겨울 왕국'을 즐겨 보는 건 알았지만, 그 영화에서 눈사람 올라프가 여름을 꿈꾸며 부르는 저 노래를 자기가 여름휴가를 즐기는 와중에 부르고 있다니! 아이가 여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지금 이곳이 어떤 계절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에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이번 여행이 많은 추억을 남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