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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시작은 에어 캐나다 바우처였다. 두어 달 전 저녁을 먹던 중 한 친구의 '에어 캐나다 바우처가 몇 장 있는데 그냥 준대도 아무도 관심 없더라'하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캐나다, 그 중에서도 퀘벡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텍사스 MBA 시절 친구가 퀘벡을 다녀온 후 '모든 것이 최고였다'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해서 언젠간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 한 구석에 박혀있던 이 다짐이 떠올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아보면 왜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지 생각해 봤어야 했다
와이프 회사의 flexibility가 워낙 좋지 않은 탓에 미국 노동절을 끼고 휴가를 1일 붙여서 간신히 3박 4일간 Montreal과 Quebec City를 방문하는 일정을 짰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토요일 새벽 6시에 출발하여 Montreal에 도착하는 에어 캐나다 직항을 끊었다. 친구가 선물한 바우쳐 덕분에 거의 공짜로 티켓을 끊었고.
하지만 여행 출발 고작 15시간 전인 금요일 오후 3시경 느닷없이 비행기가 캔슬되었다는 이메일이 왔고, 1시간 47분의 직항 비행기는 도합 7시간이 넘어가는 늦은 저녁 도착 원스탑으로 변경되었다. 덕분에 4일 중 첫날이 통째로 날아갔고, 그걸 메우기 위해 장거리 야간 운전 + 방문 일정 조정 + 강행군의 삼단 콤보를 겪어야 했다. 여유 있게 즐기기 위해 간 건데 이게 무슨 스파르타식 관광인지... 에어 캐나다가 워낙 캔슬과 연착으로 악명이 높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여행 당일날에도 20~30%가량의 비행 편이 연착 혹은 취소되는 것을 공항 전광판에서 확인하며 '역시 세상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되새겼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과 이에 따른 혼란 때문에 정신없이 지나간 여행이었지만, 이 와중에서도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확인하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몬트리올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타고 퀘벡으로 향하던 늦은 밤, 와이프와 아이는 뒷 좌석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감자튀김을 집어먹는 엄마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이는 엄마의 손을 쳐내며 먹지 말라고 투정을 부렸다.
와이프: 왜 그래 아들? 엄마 더 먹고 싶은데?
태민: No!
와이프: 더 먹으면 안 돼?
태민: Follow the instruction!
잠깐의 정적 후 차 안은 폭발적인 웃음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얼마나 학교나 집에서 말을 안 듣다가 저렇게 혼났으면 저 말을 이렇게 시의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보통 아빠나 엄마의 제안을 거절할 때는 기껏해야 소리를 지르거나 No!라고 외치는 정도였기에 아이의 새로운 반응을 보며 우리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니, 얘가 이런 말도 할 줄 알게 되었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엄마가 말 들어야지:)
결국 남은 감자튀김은 태민이가 다 먹었다고 한다.
Quebec City에서 머문 호텔은 Hilton 브랜드였다. 방은 작았지만 22층에서 시내 전체가 내려다 보였기에 뷰 하나만으로도 여행을 온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만족스러운 호텔이었다. 아이도 경치 구경이 좋았는지 자꾸 창틀에 올라서서 창 밖을 내다보곤 했다.
아름다운 시내를 걷던 중 아이에게 '우리 내일은 다른 호텔 갈 거야'라고 하자 느닷없이 'Hilton!'을 외친다. 우린 한 번도 여기가 힐튼 호텔이라는 걸 말해준 적이 없는데?? 놀라움을 안고서 '힐튼은 아닌데 여기만큼 좋은 호텔이야'라고 설명해 주자 슬픈 표정으로 '다음에 힐튼 호텔!'을 외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호텔에서 자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특정 호텔 브랜드를 이야기하지는 않았기에, 이 대화를 통해 아이가 특정한 상황과 환경을 기억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선호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취향은 올라가기만 하지 내려가는 건 아니기에 앞으로가 살짝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의 인지와 표현이 이렇게 조금씩 발전되고 있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래, 이래서 우리는 여행을 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