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 테라피 대기실은 늘 비슷한 공기로 나를 맞이한다. 무언가 분주한 냄새 그리고 복도 끝부터 들려오는 아이들의 부산스러움. 약간의 번잡스러움을 참아 넘기며 랩탑을 펴고 그날의 일을 마무리하거나 웹서핑을 하다 보면 금방 50분이 지나간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태민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몇 초 뒤 테라피스트가 태민이와 함께 대기실로 나왔다. 늘 그렇듯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오늘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설명을 듣는데, 그녀가 갑자기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태민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이 A야, B야?'라고 물어보면 정답률이 들쭉날쭉한데, 종이에 A와 B를 써놓고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90% 이상 정답을 맞히더라고요"
태민이가 시각적인 정보를 잘 받아들이는 아이 (visual learner)인 건 알고 있었다. 집에서 과제를 할 때도 그림 카드나 글자를 같이 보여주면 훨씬 덜 힘들어했고, 스케줄을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방 벽에 계획표를 붙여 놓는 식으로 소통을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같은 질문을 말로 했을 때와, 글자로 보여줬을 때 반응이 이 정도로 다르다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아이 머릿속에서는 이미 답이 정리되어 있는데 말로 나오는 과정이 유난히 힘든 걸까? 아니면, 설명을 들을 때는 집중하지 못하다가 글자를 확인하니 비로소 집중하고 이해하는 걸까?’
세상은 시각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가득하다. 이메일, 문자, 메신저, 소셜 미디어, 자막 달린 동영상, 인포그래픽…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더 빠르다고들 한다. 나만 해도 직장에서 면대면으로 소통하는 시간에 비해 이메일과 메신저, 그리고 협업 툴로 소통하는 시간의 비중이 더 높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관계는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한 뒤 적절하게 응답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나. 그게 학교 선생님이든, 친구든, 직장 동료나 상사이든,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이든 간에.
“집중력이 문제인가? 아니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문제인가?
"이 상황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까? 시간을 들여 듣고 말하는걸 연습한다면 정말 좋아질까?”
“아니면, 이 아이가 살아갈 길은 애초에 ‘보는 것’을 중심으로 다시 설계해야 하는 걸까?”
누가 정답을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테라피스트도, 이 길을 먼저 간 장애 아동의 부모들도, 학자들이 저술한 논문과 저서도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결국 어떤걸 아이에게 적용할 것인지 정하는 건 부모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태민이는 ‘답을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눈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아이’라는 것. 말로 건네진 질문에는 쉽게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여도, 글자로 보이는 세계에서는 또렷하게 길을 찾아 나간다는 것. 어쩌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왜 얘가 이걸 못하나' 조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태민이에게 어떤 의사소통 방식이 편한지 고민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설령 태민이에게 '듣기'라는 문이 조금 좁다면 '읽기'라는 이미 넓게 열린 문을 활용하자. 그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길도 분명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