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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유 May 03. 2019

어쩌다 나는 사장이 되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또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향후 CEO가 될 사람은 이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늘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긴 했었다. 그래서 경영 관련 서적들도 틈틈이 보았고, 승선 시절에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늘 내가 이 직무를 어떻게 수행하면 우리 선박이 돈을 더 많이 벌게 되고, 이런 선박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가 돈을 벌고, 그리고 이런 회사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해운이 커지는 가에 대해서 늘 고민하곤 했다. 그래서 엔지니어임에도 불구하고 해운업계의 동향이나 전략 등에 관한 잡지도 꾸준히 구독해서 보았다. 


 승선 생활 특성상 6~10개월씩 땅 한번 밟지 못하고 승선 생활을 하다 유급 휴가를 받았었는데 이 때면 친구들 만나 부어라 마셔라 하기보다는 여기저기 성공한 사람들, 선배님들을 찾아뵈어 자문을 구하고 조언을 듣곤 했다. 또한 경영에 대한 세미나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당시 EBS에서 한 CEO 특강이었다. 한 번은 CEO 특강에 갔다가 한 분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향후 CEO가 될 사람은 이 강연을 듣는 사람 중에는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물론 이 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CEO가 되려고 지금부터 CEO가 되는 방법 그 자체를 쫓고 준비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고 성장하다 보면 우수 인재로 인정받고, 팀장이 되고, 이사가 되고, 상무가 되는 등 의도하지 않아도 CEO의 자리로 가게 된다는 조언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현재의 직무에 충실해 인정받는 인재가 되는 것 하나에만 집중했다.



"LNG FPSO 분야의 Specialist를 꿈꾸고 있었지만.."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4년간 한국과 중동을 오가며 LNG(액화천연가스)를 운반하는 초대형 LNG 선박에서 선박 기관의 유지보수 엔지니어로 근무를 할 때 우연히 D사에서 건조한 LNGC 4척 만을 승선했었다. 그 우연의 경력을 살려 학부 시절 때 배운 기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조선 3사 중 한 곳인 D사의 설계 부서로 입사하게 되었다. 승선 이력이 LNGC에 있었던 만큼 입사 후 선박 가격만 1조 원에 육박하는 세계 최초의 해상 LNG FPSO Project에 바로 투입되었다.

 본교 출신 중 승선 경험을 살려 해운, 조선업계 내 다양한 직업으로 멋지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조선소의 시운전이나 생산, 품질 부서가 아닌 설계 부서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특별한 이력이었다. 조선 3사를 통틀어 2~3년에 1~2명 정도 설계 부서에서 근무를 한다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내 인생의 청사진은 아주 밝다고 생각했고 LNG Plant의 운용 경험과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공대 출신 최고 경영자를 꿈꾸며 여느 누구들처럼 직장생활에 올인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여보, 우리가 시댁의 가업을 한번 키워보는 게 어때?"


 거제도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나는 조선소의 이른 출근 시간에 맞추어 달을 보고 출근해 달을 보고 퇴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딸아이를 출산하며 여느 직장인처럼 소박하게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아내가 나에게 시댁의 가업을 우리가 한번 제대로 키워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유는 어머니께서 만들고 지켜온 가업을 작게 두기에는 어머니의 정신과 가치 그리고 그 제품이 너무 아깝다는 것.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더 많은 분들께 널리 알려보자는 것이었다. 


 이제 갓 3세인 딸아이의 양육과 내 나름의 인생 계획, 직장에서의 성장 계획 등 모든 것에 정면 하는 제안인지라 당황스러웠다. 또한 우리 두 사람은 경영과 식품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의도는 좋지만 막상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께 말씀을 드리니 당장 부모님께서도 반대하셨다. 아직 기업의 형태도 아니었고, 엄마와 이모 그리고 임신한 누나를 대신해 돕고 있던 매형. 이렇게 가족 3명이 소소하게 운영하던 브랜드를 기업화시켜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나간다는 것 그리고 번듯한 회사에서 직장 생활 잘하고 있는 우리가 모든 걸 내려놓고 들어온다는 것이 몹시나 부담스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정의감, 사명감, 절실함, 진정성 그리고 회색도시 경남 거제에서 일단 탈출하고 보자는 어떤 열망이 합쳐져 결국 3년여 남짓한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경남 거제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공장과 출퇴근 거리 15초(도보 기준) 거리에 위치한 한 빌라로 이사했다. 이때가 2015년 6월 24일, 내가 어쩌다 사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도 이렇게 일찍 사장이 될 줄 몰랐다."


 해운, 조선 분야의 전문경영인을 꿈꾸던 내가 어쩌다 식품 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여느 2세, 3세 경영인이나 스타트업 사장들처럼 경영을 공부할 금전적, 시간적 여유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이 되었다. 그때 당시 이후 약 4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공부와 만남, 경험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한창 실패와 성공을 들숨, 날숨처럼 거듭하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시도와 노력 속에 우리 브랜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고, 회사는 내실을 다지며 성장하고 있다. 그 다양한 이야기들을 브런치를 통해서 소소하게 적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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